프롤로그
생활을 위해 오늘도 하루를 나선다.
같은 버스, 같은 길을 지나 같은 사무실 문을 열면 왼편에 복사기, 이주임 자리와 김주임 자리를 지나 세 걸음 더 가면 오늘 내가 앉아 일할 의자가 나온다. 그래도 출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야 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시간 산으로 가는 동창을 생각한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은 안양시 석수동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20만 원짜리 월세 단칸방에서 굶어 죽었다(2010년). 32살.
-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그녀의 말이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 맴돌고 있다. ‘배 불뚝 달빛요정’ 가수 이진원은 노래를 한다.
-일주일에 단 한번 고기반찬 먹게 해 줘(노래명 도토리).
정규앨범 3장에 8년을 노래해도 연 수입 1,000만 원이 못된다.
밥은 진정 메시아이고 구원일 것이니 날마다 큰 변화 없이 반복을 반복하며 또 다른 꿈을 꿔오던 글쟁이로서의 포부랄까, 뭐랄까, 젠장 하루 종일 시만 쓰며 살 수는 없을까. 시 써서 밥 먹고 그리고 시간 나면 또 시 쓰고, 그러면서 전업시인이란 말 듣고 살 수는 없을까.
시인을 직업으로, 시만 쓰고 살면 어떨까. 거의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이다. 예술 장르 중 수입면에서 무명 시인이 최하위, 그 위가 무명 연극인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살기 위해 직장을 가져야 한다. 거의 그렇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시인이 시만 쓰고 산다는 것은 사치한 향락이고 화려한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범한 것일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먹고살기 위해 출근을 하고, 포장마차를 끌며 저잣거리로 향하고, 지하철에서 1,000원짜리 장갑을 파는 이들은 사실은 위대하다. 살아줘서, 살아줘서 위대한 것이다. 이제 보니 살아있는 삶 자체가 '이미 날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이상의 날개를 배울 때는 몰랐다. 먹이 따위를 초월해 날 수 있는 자만 진정으로 '날 수 있는 자'로 알았었다. 가난하지만 날고 있는 이상이 종적 상위계층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절망과 소망이라는 별을 찾아다니던 작가 이상은 사실은 살아생전 이미 날고 있었다.
날기 위해 사는 조나단 리빙스톤시갈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 온 바닷가와 쓰레기통속을 뒤져 멸치대가리를 찾는 '성실한 이웃집 갈매기들'도 실은 귀한 삶으로 날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그 자체가 귀한 삶이다.
세상을 보자. 이제 보니 우리 주변 모두들 다 열심히 날고 있다. 세상은 엄연한 계급사회이나, 우리는 그것과 상관없이 세상이라는 고해(苦海)에 살고 있기에,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살아 있는 자들은 이미 하늘을 활강하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굶어 죽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도, 빈한하게 살다 간 달빛요정가수 이진원도 실은 위대하게, 위대하게 날개 짓 하며 살다 간 것이다. 다만 주어진 인간의 평균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간 것이 가슴을 친다. 우리가 이 거친 세상에서 진실하게, 열심히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 날고 있는 것이다.
시 안 쓰면 어떤가. '시처럼'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빈부귀천 이전에 진실하게 살고 또 열심히 사는 삶이면, 그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날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