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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Aug 28. 2023

별의 얼굴

<오펜하이머>가 그려낸 새로운 스펙터클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별이 죽는다면 식은 뒤 붕괴하죠. 별이 클수록 그 소멸의 과정도 더 격렬해요. 중력이 너무 응축돼서... 모든 걸 집어삼키죠. 심지어 빛까지."


놀란은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 질문은 개봉 전부터 기대감을 모은 CG 없이 구현한 핵폭발 장면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얼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는 시각적인 스펙터클이 거의 없다.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와 거리가 있는 건 그래서다. 이러한 스펙터클을 배제하고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면서까지 놀란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액션이 아닌 리액션의 영화

나 역시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트리니티 테스트 신을 기대했다. 놀란은 아이맥스를 가장 잘 활용하는 감독 중 한 명이지 않은가. 그가 아이맥스 카메라로 최초의 핵폭탄 실험을 찍는다면 틀림없이 웅장하고 강렬한 명장면이 탄생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해당 장면은 적지 않은 관객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핵폭발이 핵폭발 같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CG 없이 핵폭발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며 홍보했지만, 전혀 위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평범한 폭발 같았다는 거다. 급기야 이럴 거면 CG를 썼어야 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핵폭발이 다소 초라해 보였다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더 위력적이면서 공포스럽게 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핵폭발 장면은 <오펜하이머>의 유일한 '스펙터클'이 될 여지가 있었다. 놀란은 유일하다시피 한 그 장면마저 스펙터클을 배제했다. 이것을 연출의 실패로 봐야 할까.


트리니티 테스트의 핵폭발 그 자체에서 오는 감흥은 적었다. 심지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보여주지도 않고 간접적으로 언급만 나올 뿐이다. 즉, <오펜하이머>는 의도적으로 시각적 스펙터클을 경계하는 영화다. 만약 핵폭발 장면을 시각적으로 스펙터클하게 그려낸다면 그것이 유희적으로 소비될 여지가 있을 것이다. 혹은 그 장면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등 스펙터클 그 자체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완전히 반대된다.


그 대신 놀란은 핵폭발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얼굴을 강조한다. 중요한 건 핵폭발 그 자체가 아니라 핵폭발이 내뿜는 빛과 충격에 하얗게 질린 인물들의 얼굴, 얼어버린 눈동자, 떨리는 숨소리다. 핵폭발에서 오는 시각적 쾌감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와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핵폭탄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 다시 말해, <오펜하이머>는 액션(action)이 아닌 리액션(reaction)에 집중한 영화다.


새로운 스펙터클을 실험하다

그렇다면 놀란은 왜 아이맥스를 고집했을까. 시각적 쾌감을 포기하고 인물들의 얼굴, 특히 오펜하이머의 얼굴에 집중했다면 굳이 아이맥스를 사용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내가 볼 때 오히려 그 지점이 놀란으로 하여금 아이맥스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아이맥스는 대작 영화에서 시각적인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한다. 놀란은 인물들의 얼굴을 아이맥스로 담아내면서 이를 역이용한다. 그렇기에 <오펜하이머>는 일종의 실험이다.


이는 조던 필의 <놉>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영화 모두 아이맥스 카메라의 일반적인 활용법을 따르지 않았다. <놉>의 경우, 스펙터클의 이중성과 시선의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해 아이맥스 카메라를 활용했다. 그럼 <오펜하이머>는? 특수효과에서 오는 시각적 스펙터클이 아닌 인물들의 얼굴에 따른 새로운 의미의 스펙터클. 바로 얼굴의 스펙터클, 감정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괴팅겐에서 그토록 원하던 학문을 공부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은 듯 미소를 띠는 오펜하이머의 얼굴이 끝내 절망에 휩싸인 얼굴로 바뀔 때, 입체파 그림의 파도와 반짝이는 입자의 폭풍을 마주하려는 오펜하이머의 눈빛이 끝내 회한에 잠긴 눈빛으로 바뀔 때를 아이맥스로 담아내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스펙터클을 구현한다. 이제 놀란은 아이맥스가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을 극대화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놀란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오펜하이머라는 별

<오펜하이머>에는 원자폭탄의 핵분열, 수소폭탄의 핵융합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가 유럽에서 배운 양자역학 역시 마찬가지다. 추가로 나는 이것 역시 영화상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고 생각한다. 바로 별이다. 별들의 입자가 움직이고 수축하여 폭발하는 장면이 인서트 컷으로 삽입되거나,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는 장면은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또한 그는 별의 죽음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이후 슈발리에(제퍼슨 홀)의 별도 죽냐는 물음으로 한 번 더 나온다. 이쯤에서 별의 죽음에 대해 되짚어보자. 별은 식은 뒤 붕괴하며 크기가 클수록 소멸의 과정도 더 격렬해진다. 중력이 응축되어 빛까지 삼킬 수도 있다. 이렇듯 두 번이나 언급된 만큼 오펜하이머와 별은 뗄 수 없다. 특히 끊임없이 타오르고 폭발하며 휘몰아치는 그의 내면은 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한 번 가정해 보자. 오펜하이머는 별이다.


별은 수소를 태우며 빛을 낸다. 그러다 중력이 커지고 천천히 식어가며 수축한다. 이후 엄청난 빛과 함께 폭발한다. 이를 초신성이라 부른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그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된다. 별이 긴 세월에 걸쳐 마지막까지 남은 에너지를 전부 끌어모으는 것은 흡사 모든 과학적 성취가 동원된 맨해튼 프로젝트를 보는 듯하다. 또한 초신성이 내뿜는 빛과 에너지는 오펜하이머의 명성과 영향력이 극에 달했음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초신성이 가장 밝게 타오른다 한들, 별의 죽음에 불과하다. 오펜하이머 앞에는 냉혹한 검증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 그가 미국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라 할지라도 공산주의자 혹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로 '의심받는' 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형벌이 끝나고 모두가 용서한다 해도 아인슈타인(톰 콘티)의 말처럼 오펜하이머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끌어와 원자폭탄을 만들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펜하이머는 별이라는 정체성 탓에 예정된 폭발로 향한다.


그러나 그걸로 끝난 것일까. 맨해튼 프로젝트로 가장 밝게 빛났던 자의 급격한 몰락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얼굴로? <오펜하이머>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오해, "뭔가 더 중요한 얘길 했을 수도 있"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의 연쇄반응으로 대기가 불에 타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텔러(베니 사프디)의 계산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아인슈타인을 찾아갔던 일화를 떠올린다. 빗방울이 연못에 떨어지며 파문을 그리는 장면과 참담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파멸의 연쇄반응이 시작된 것 같다는 오펜하이머의 말이 이어진다. 그는 각국의 핵경쟁과 더 심화될 전쟁의 공포를 환상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의미의 연쇄반응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동시에 이 연쇄반응이 자신에게서 시작되었음을 깨닫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초신성 폭발 후 별은 질량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오펜하이머는 세계 역사를 뒤바꾼 인물이다. 너무나 큰 성취를 이뤄낸 오펜하이머는 그렇기에 어마어마한 질량을 가진 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폭발 후 빛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에게서 시작된 파문이 거대한 재앙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 재앙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 오펜하이머의 얼굴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말과 오펜하이머의 마지막 얼굴은 비로소 우리가 사는 지금으로 향한다. 오펜하이머의 환상이 현실이 된 지금. 이제 오펜하이머를 바라보는 관객의 구도가 아닌,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구도로 반전된다.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끝나지 않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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