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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07. 2023

우는 소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해석 1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외면을 보는 사람은 꿈을 꾸고, 내면을 보는 사람은 깨어 있다." - 자크 라캉


지브리의 소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파즈도, 톰보도, 하쿠도, 소스케도 없다. 꿈을 좇다 비극을 맞이한 지로마저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어살>)에는 어두운 시대에 덩그러니 놓여 슬픔을 억누르고 상처에 신음하며 거짓된 얼굴을 하는 소년만이 보인다.

 

지금까지의 지브리 영화를 살펴보면 강인하고 지혜로운 소녀,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랫동안 피했던 일, 내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쾌활하고 밝고 긍정적인 소년에 대한 영화를 몇 편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자신이 정말 우울한 사람이었기에 소년이라는 건 좀 더 어둡고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자신이 지금까지 그려온 소년상이 실제 자신의 모습과 괴리가 있었음을 고백했다.


즉, <그어살>은 82세의 거장이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음을 밝히는 영화다. 다시 말해, 관객이 지브리에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펼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1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어살> 리뷰 첫 번째 편에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영화에서 그려진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가려진 하늘

모두가 잠든 밤, 요란한 사이렌이 사람들을 깨운다. 바람은 매캐한 냄새를 싣고 붉은빛이 하늘을 물들인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우리가 마주한 건 전쟁의 참상이다. 그것도 실제 역사적 사건인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 떨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태평양 전쟁을 직접적으로 끌고 왔을까. 당연히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근대적 풍경과 전쟁의 폭력이 고스란히 그려진 바 있다. 오래전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전히 일본이 근대적 가치관에 머물러 있고 이로 인해 개인이 억압당한다고 보았고 이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 그렇다면 <그어살>을 만들 때도 이러한 믿음이 태평양 전쟁을 다시 불러온 걸지도 모른다.

 

근대는 인간의 이성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여기서 이성이란 서구 입장에서 합리적인 것이다.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 합리적이지 않은 가치들, 비과학적인 요소들은 방해물에 불과하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따라야 한다. 이는 곧 보편성으로 이어진다. 개인은 무시되고 모두가 동일한 가치 아래 단결하는 것. 문명이라는 톱니바퀴를 작동시키기 위해 개개인이 도구가 되는 것. 그리고 이에 반하는 것들은 제거 대상으로 삼는 것. 이렇듯 근대는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켰고 제국주의와 같은 위험한 사상을 촉발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는 증기 기관차의 매연, 거대한 군함들이 하늘을 뒤덮는다. 미야자키에게 이상향이란 푸른 하늘이다. 전쟁, 근대, 군국주의 일본에서 미야자키의 이상향은 실현될 수 없다. 또한 하울이 어릴 적 설리먼과 국가에 의해 착취당할 뻔한 것도 개인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개조하려는 전체주의, 군국주의의 폭력이다.

 

<그어살>에서는 화재로 인한 불길과 연기가 밤하늘을 가린다. 마히토의 절규와 건물이 붕괴되면서 내는 굉음은 이후 탱크가 진격하는 소리로 전환된다. 마찬가지로 하늘은 거리를 가득 메운 일본군과 그들을 지켜보는 군중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소중한 사람을 앗아가고 국민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군국주의 일본은 이러한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전쟁의 확산으로 뛰어든다. 국민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이제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주인공 마히토를 알아보자. 마히토는 어린 소년이지만 깍듯하고 성숙해 보인다.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지만 결코 남들 앞에서 티를 내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장한 모습일 수도 있고, 새어머니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의 말처럼 ‘훌륭하게’ 자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히토의 이러한 성격은 국가의 정체성 주입에 따른 결과처럼 다가온다. 국가 권력에 복종하고, 전쟁 승리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군국주의 일본이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 마치 하울이 우는 법을 잊어버린 괴물이 된 것처럼 마히토도 타인에게 약점, 상처를 노출하지 않고 국가가 내건 가치에 충성하도록 교육받은 것이다.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일본군 출정식을 향해 인사하는 장면에서 더욱 삭막하게 연출된다. 군국주의의 시대상은 이처럼 참혹하기 그지없다.


마히토도 분명 슬프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상처다. 이런 슬픔이 씻겨 내려가기도 전에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결혼했고 새어머니는 동생을 임신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참아야 한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것이 가정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동을 억누르기만 할 수는 없다. 이는 마히토가 홀로 남겨졌을 때 폭발해버린다. 가령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꿈으로 나타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심지어 자해를 하며 상처를 내기에 이르는 상태로 악화된다. 이는 마히토가 여전히 관심이 고픈 아이면서 어머니의 부재와 곧 태어날 동생이 그를 고립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 거기에 더해 전학 간 학교에서도 배척당하니 자신에게 상처를 내면서까지 슬픔과 분노를 표현한다. 마히토는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너지기 직전의 소년이다. 그렇기에 <그어살>의 세계에서는 지브리의 소년이 나오는 게 불가능하다.


아버지라는 존재

이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정녕 없는가. 겉보기에는 마히토의 아버지 쇼이치(기무라 타쿠야)가 그를 지탱해 주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쇼이치는 분명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다소 다르게 다가올 지점들이 있다. 쇼이치는 마히토가 다친 것에 분노하면서도 오직 누가 상처를 냈는지 밝혀내고 복수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와중에 학교에 거액을 기부했더니 교장이 깜짝 놀랐다며 으스대기까지 한다. 이때 쇼이치의 모습은 화면 가득 채워지며 마히토를 내려다보는 구도다.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장면은 마히토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심지어 이때 쇼이치는 마히토와 할머니와의 대화를 끊으며 침입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쇼이치는 마히토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흉터가 남겠지만 머리카락이 자라면 안 보일 거라고 말한다. 상처를 서둘러 봉합하고 흉터를 가리려 하는 아버지는 마히토의 상처, 감정을 헤아려 보려고 하거나 공감,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나아서 아픈 새어머니에게 문병을 가라는 말을 한다.


쇼이치는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보단 자신의 위상을 고려하는 언행을 이어간다. 또한 자신이 운영하는 군수 공장에 집중하는 모습도 보인다. 즉, 영화는 그가 전쟁 부역자라는 걸 명확히 한다. 앞서 전쟁은 마히토의 어머니를 잃게 만들고 하늘을 가려버렸다고 한 바 있다. 따라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고 가부장적이며 자신의 위상을 중요시하는 쇼이치는 근대적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긍정적으로만 그려질 수 없는 인물이다.

 

쇼이치가 마히토와 나츠코, 키리코를 찾으러 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는 일본도를 차고 탑으로 향한다. 만약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버지를 향한 무한한 존경과 근대 일본을 낭만화하였다면 아버지가 가족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를 발견한 쇼이치는 몰려드는 앵무새 떼를 향해 일본도를 휘두르지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새똥을 뒤집어쓰고 마히토가 앵무새로 변해버렸다며 울부짖는다. 가부장적 아버지, 근대적 남성성은 그 무엇도 해결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꼴을 당한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족을 안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가 시선을 공장과 전쟁, 부에서 온전히 가족에게로 돌렸음을 의미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근대적 남성성을 조롱하고 해체한다.


가면을 벗고 그림자로 향하다

이러한 마히토의 모습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 외면해 온 소년의 모습이자 자신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도 가능하다. <그어살>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내면, 무의식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면, 마히토가 여정을 떠나는 곳은 마히토 자신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가정 말이다. 밝고 긍정적인 소년을 그려온 미야자키 하야오가 사실은 무의식에 내재된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는 얼굴을 한 마히토가 상실과 상처를 숨기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은가. 따라서 내면을 드러내기와 무의식으로의 여정은 칼 융이 말한 것처럼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그림자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칼 융은 페르소나와 그림자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외면적으로 보이길 원하는 자신의 모습, 사회적 가면이다. 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 진정한 자아와 다르며 오히려 자신을 은폐시키려 한다. 그에 반해 그림자는 무의식에 들어 있는 자아의 어두운 측면을 의미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두려워하는 것들이 자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어살>을 통해 긍정적인 소년상이라는 페르소나를 이제야 벗고 복잡하게 얽힌 소년성과 트라우마라는 그림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비로소 인정했다. 자신이 전쟁 중에도 군수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전쟁 부역자였다는 것을, 남에게 밝히지 못한 트라우마가 자신을 괴롭혔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된 가면을 썼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를 외면하고 전쟁 반대를 외치고 순수한 세계를 그려왔다는 것을. 자신의 어두운 측면과 부끄러움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를 낭만화하지 않은 것은 대단한 용기다. 더 나아가 당시 시대상과 주변 인물들이 가지는 상징을 통해 페르소나와 무의식을 마주하도록 설계한 건 분명한 성취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마히토는 어떤 계기로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되었을까. 무의식은 어떻게 형상화되었으며 어떤 여정을 그려냈는가. 이 여정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마히토는 무엇을 얻었는가, 와 같은 물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탑 안으로 들어가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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