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이사는 평생 회사를 ‘가족’이라 여기며 살았다. 퇴근 후에는 주로 자기 방에 틀어박혀 신문을 보거나 자료를 정리했고, 아내가 자녀 문제나 집안일을 이야기할라치면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해결책은 뭐야?”와 같은 ‘업무에서 사용하는 말’로 대화했다. 최 이사는 가족과 다양한 감정을 주고받는 관계는 아니었다.
최 이사는 퇴직 후 집에서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거실에 앉아 TV를 보는데 아내가 손녀와 통화하며 손녀의 시시콜콜한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다. 아내는 손녀에게 "많이 힘들었겠다, 할머니도 그럴 때가 있었지"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손녀를 다독였다. 최 이사는 아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평생 가족에게 문제 해결사였지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남성들은 오랜 세월 외부의 적과 싸우는 전사처럼 살아왔다.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강함과 이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겼다. 목표 달성을 위한 냉철한 판단, 효율적인 문제 해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굳건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업무 지능’의 세계에 온몸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한 감정은 물론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비효율적인 요소로 치부하며 억누르는 경향이 강했다. 남성에게 감정 표현은 약점으로 비치거나 쓸데없는 소리로 치부되곤 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도 남성의 역할은 주로 경제적 가장에 머물렀다. 정서적인 교류보다는 물질적인 지원에 무게를 둔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거대한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남성들은 직업 전선이라는 거대하고 강렬했던 물결에서 퇴직이라는 잔잔한 물결로 들어서는 순간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더는 싸워야 할 외부의 적도, 달성해야 할 직업적 목표도 없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는 전투를 위한 감정 억제는 더는 미덕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가족과의 연결이다. 그리고 이때 마치 봉인 해제된 것처럼 비로소 정서 발달이라는 새로운 성장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다.
1. 퇴직은 업무 지능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생활 지능’이 필요한 세계로의 이주를 의미한다.
퇴직은 직업이라는 정체성 뒤에 숨어 있던 개인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정서는 더 이상 비효율적인 것이 아니라, 가족과 깊은 연결을 위한 핵심 언어가 된다.
발달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남성이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삶의 초점이 외부 지향적인 성취에서 내부 지향적인 ‘관계’와 ‘내면 성찰’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인다. 젊은 시절 남성 호르몬(테스토스테론)의 영향으로 경쟁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행동이 강했다면, 노년기에는 이 수치가 자연 감소하며 상대적으로 여성 호르몬의 영향이 커지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생물학적으로도 더 공감적이고 관계 지향적인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다. 즉, 퇴직 후 정서 발달의 필요성은 단지 사회적 압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간 발달 과정의 한 부분일 수 있다.
2. 퇴직은 가족 관계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대이다.
퇴직자는 남편·아버지로서 ‘경제적 가장’이라는 주된 역할은 사라지고 가족이라는 새로운 팀의 구성원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서 발달’을 통한 공감 능력 향상이다.
퇴직 후 가장 큰 적은 외로움과 고립이다. 이때 가장 강력한 사회적 지지망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하지만 정서적 연결이 단절된 가족은 고립감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 퇴직자가 먼저 정서적 성장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에 다가가 공감할 때 가족은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외로움과 고독의 벽을 허물어 줄 것이다. 이를 위해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
3. 정서 발달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
남편과 아내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동거인이 된다. 퇴직자는 배우자가 경험하는 외로움, 불안감, 우울감 등 다양한 감정을 함께 느끼고 공감할 때 부부 관계는 더욱더 깊어질 수 있다.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미안하다’, ‘고맙다’, ‘힘들었지?’라는 따뜻한 감성의 언어가 비로소 배우자의 마음을 치유하고 부부간의 진정한 유대를 회복시키는 힘이 된다.
성인이 된 자녀들은 더 이상 훈육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친구이자 동료이다. 이때까지 직업적 성공만을 강조하며 자녀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는 자녀의 삶과 감정에 공감하고 지지해 주는 역할이 중요해진다. 자녀는 아버지의 조언보다는 ‘진정한 관심’과 ‘공감’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최 이사는 퇴직 후 깨달음을 얻은 뒤 다양한 노력을 시작했다. 최 이사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내가 너무 무심했지? 미안해”라고 솔직하게 마음을 전했다. 아내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눈물을 보였다. 아내가 TV 드라마를 보며 울면 예전처럼 “저게 뭐가 슬프다고 우냐?”라는 부정적 반응 대신 옆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묵묵히 함께 드라마를 시청했다. 손녀에게는 “할아버지가 네 마음을 백 퍼센트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네가 힘들면 언제든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은 최 이사의 이런 변화에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최 이사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아내와 자녀, 손녀는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집안에는 비로소 따뜻한 정서적 공감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정서 발달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수십 년간 굳어진 사고방식과 감정 억제 습관을 바꾸는 것은 아프고 어려운 성장통과 같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퇴직자는 비로소 직장인이라는 전사의 갑옷을 완전히 벗고 한 사람의 따뜻한 인간으로서 가족과의 진정한 연결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퇴직 후의 삶을 채우는 가장 풍요롭고 의미 있는 성취가 될 것이며, 외롭지 않고 행복한 황혼기를 보내기 위한 필수적인 발달 과정이다.
퇴직은 삶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자신과 가족을 온전히 마주하고 새로운 관계의 지평을 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이다. 이 소중한 기회를 정서 발달이라는 아름다운 성장으로 가득 채운다면 퇴직자의 삶과 가정에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 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