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섯 아들을 키우신 할머니에겐 손녀지만 딸 노릇을 하며 지냈다.
집안일은 기본이고, 밭일과 바닷일까지 도왔다. 학교가 끝나면 반나절을 늘 그렇게 보냈다. 할머니는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보듬어주고, 오냐오냐 키워주셨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중학생 때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상황은 달라졌다. 점점 쇠약해진 할아버지를 간병하는 건 거의 내 몫이었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식사를 차려드리고, 피부에 약을 발라드리며 늘 곁을 지켰다. 학교에 가지 않는 시간엔 내가 집에 없으면 할아버지는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부르셨다. 대답이 들리지 않을 때는,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이름이 싫어졌고,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아빠와의 시간도 힘들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면 늘 싸움이 이어졌다. 말리던 나와 동생은 집 밖으로 쫓겨나 담을 넘어 다시 들어가곤 했다.
새벽은 물론 낮에도 담을 넘는 건 일상이 돼버렸다. 집은 늘 전쟁터였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시끄럽기로 소문만 집안이었다.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있었다. 떠돌이 하얀 개를 주워 키우며 겨우 웃음을 찾던 때, 아빠는 보름달 뜬 밤 술에 취해 조용히 마당을 지나가는 짐승에게 옆에 있던 담배 재떠리를 던졌다. 짐승에 울부짖은 소리에 나와 남동생은 잠에서 깨어 마당으로 달려 나왔고 핸드폰 불빛으로 그곳을 비추자 화분들 사이로 쓰러져있는 짐승은 바로 내가 좋아했던 우리 강아지였다. 혀를 내밀고 빨간 눈이 된 채 축 늘어진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보고 나와 동생은 처음으로 아빠에게 욕을 퍼붓고 등을 마구 쳤다. 그 강아지를 수건에 감산채 쓰다듬어주며, 울면서 다음날 아침 동생과 좋은 곳으로 가라고, 산에 묻어주었다 그 뒤로 다시는 우리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집은 늘 불안과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이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꼭 집안이 시끄러울 때면 몇 번이고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갔다. 2층 높이의 그 옥상은 죽을 만큼 높지도, 그렇다고 안전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어린 나는 그곳에서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울곤 했다.
몇 번은 아빠가 쫓아온 적도 많아 회관 캄캄한 보일러실에 들어가 숨고 할머니를 기다린 적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흐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교회 옥상 위의 십자가였다. 까만 하늘 속에서 붉게 깜빡이는 그 빛은 내 마음을 붙잡았다. 나는 눈물로 기도했다.
“왜 나를 이런 집에 태어나게 했어요? 왜 난 이렇게 못생기고, 힘들게만 살아야 해요? 제발 잘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사랑받게 해 주세요.”
십자가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분명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할머니가 옥상에 올라와 “느그 애비 잔다. 이제 집에 가자” 하고 손을 잡아주셨다. 시끄럽던 하루가 매일 그렇게 끝났다.
지금 돌아보면,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 내겐 커다란 힘이었다. 교회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술에 취한 아빠에게 화가 난 가족들이 “짐 싸서 느그 새끼들 데리고 다시 광주로 올라가라!”라고 소리치던 날도, 나는 조용히 짐을 싸고는 다음날 아침 끝내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짐을 다시 풀고,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갔고, 아빠는 아무 날 없이 방에서 나오시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건 결국 믿음이었다.
그렇게 붉게 빛나는 십자가에 기대며, 나는 중학생 시절의 3년을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고등학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