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중학생 시절 3년을 버텨내고,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다. 졸업할 무렵에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아빠와는 점점 멀어졌다.
술을 자주 드시던 아빠는 결국 가족의 합의로 집을 나가 혼자 지내게 되었다. 나와 동생은 시골에 완전히 내려와 삼촌들과 함께 밭일, 논일, 바닷일을 도우며 살았다. 아빠는 가끔 술에 취해 우리를 보러 오셨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고 남은 가족들은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독립도 길지 않았다. 반년쯤 지나 아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빠가 술을 안 드실 때만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보면 막차가 끊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 간호까지 맡아야 해서 남들처럼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능을 보고, 졸업을 맞았다.
할아버지는 결국 내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1월 초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날 나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는 순간 숨이 막히듯 오열했다. 곧장 삼촌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지만, 너무 급하게 나가느라 검은 바지에 빨간 옷을 입고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 경험하는 장례식이라 당연히 드라마에서처럼 상주복을 빌려 입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친척들은 모두 흰 리본을 달고 있었고, 나 역시 흰 리본만 달았을 뿐 다른 상복은 주어지지 않았다. 오직 나만, 빨간 옷차림 그대로였다.
그 순간 느낀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분했고, 억울했고,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렸다. 이상하게도 늘 잔소리하고 욕도 하시던 분이라 시원하게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정작 나는 누구보다 크게 울었다. 아마도 할아버지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장례를 치른 뒤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를 찾았을 때, 다른 어르신들이 할머니께 말씀하셨다.
“미숙이가 제일 할아버지 옆에서 간호했는데, 어떻게 상복도 안 입히고 일만 시키냐고. 빨간 옷 입고 상 치우는 거 보니 짠하더라.”
그 말을 들은 뒤에야 할머니는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하셨다. 하지만 정작 나는 왜 그랬는지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그 사실이 더 서운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상복은 직계 가족이나 4촌, 8촌까지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집안마다 방식은 다르다지만, 그날의 나는 손녀가 아니라 그저 남처럼 취급당한 기분이었다.
장례식이 끝나자 집안의 공기마저 달라져 있었다. 빨간 옷을 입고 서 있던 나는, 상주라는 무게를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조금은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