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시인 문학평론가
박성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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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조금만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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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民 박철언
가랑비 소리 없이 서서히 스며들듯
그대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오소서
밤하늘 별들의 속삭임처럼
고요한 꽃 향으로 내게 오소서
지나온 시간 속 어두운 허물들
하나하나 남김없이 옷 벗어
내 영혼 샘물처럼 맑아질 때 오소서
남아있는 시간의 수레 위
흔들림 없는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 때
설레는 가슴으로 살포시 오소서
내 허물 벗겨져 새살이 돋고
내 영혼에 새 움 돋아나면
그대 내 가슴에 영원히 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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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사랑을 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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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오라는 말의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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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천천히”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랑을 재촉하지 않는다.
요즘 세상은 무엇이든 빨리 도착해야 안심하는데, 이 시는 오히려 속도를 늦춘다.
천천히 오라는 말속에는 조급함을 내려놓은 사람의 숨결이 있다.
사랑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겠다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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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처럼 스며드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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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소리 없이 서서히 스며들듯.”
사랑을 폭풍이나 번개로 그리지 않는다.
조용히 스며드는 비다.
이 표현은 사랑을 감정의 격랑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로 본다.
스며듦은 겉이 아니라 속을 바꾸는 일이다.
사랑은 나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적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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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와 별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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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별들의 속삭임처럼 / 고요한 꽃 향으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비유된다.
속삭임, 향기, 고요.
이 시에서 사랑은 감각의 가장 낮은 음역에 있다.
요란하지 않다.
별빛처럼 멀리서도 닿고, 향기처럼 가까이서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시는 끝내 소리를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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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벗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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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중심은 사실 기다림이 아니라 ‘정화’다.
“지나온 시간 속 어두운 허물들 / 하나하나 남김없이 옷 벗어.”
사랑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벗어야 할 것들이 있다.
상처, 자만, 두려움, 미움.
이 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을 묻는다.
사랑은 누가 와서 완성해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가 맑아질 때 비로소 머무는 것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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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샘물로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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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샘물처럼 맑아질 때 오소서.”
샘물은 스스로 솟아난다.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불교의 정화 사유와도 닿아 있고, 기독교적 회개의 정서와도 닿아 있다.
맑아진다는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면의 투명함이다.
사랑은 맑은 곳에만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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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수레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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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시간의 수레 위.”
시간을 수레로 본 감각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미 지나온 시간을 끌고 살아간다.
그 위에 무엇을 싣느냐가 삶을 결정한다.
흔들림 없는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 때 오라는 말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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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의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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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가슴으로 살포시 오소서.”
설렘은 있지만 과장이 없다.
살포시라는 부사는 사랑의 방식까지 제안한다.
이 시는 강렬한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갈 사랑을 말한다.
조심스럽고, 다정하고, 준비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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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벗기와 새살 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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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은 변화를 말한다.
“허물 벗겨져 새살이 돋고 / 내 영혼에 새 움 돋아나면.”
이 이미지는 뱀이 허물을 벗듯, 나무가 움을 틔우듯 생명의 갱신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은 감정의 충동이 아니라 존재의 탈바꿈이다.
벗겨지고, 돋아나고, 자라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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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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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 가슴에 영원히 품으리.”
마침내 기다림은 소유가 아니라 ‘품음’으로 끝난다.
품는다는 것은 안는 것이다.
지배가 아니라 보호다.
이 시는 사랑을 얻는 법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맞을 준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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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오라는 말은 사실
사랑을 향한 가장 깊이 있는 용기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결심이면서
먼저 나를 맑아지겠다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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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성숙한 사랑 시이면서 동시에
서정시며 수행의 시다.
사랑을 기다리며,
자신을 단련하는 시인의 고요함이 드러나는 기도의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