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을 읽으며 듣노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윤동주⌜참회록⌟
어느 봄날 담을 넘었지. 내 나이 열여덟, 연약한 시절이었지. 부모님께서는 사내대장부로서 뜻을 세워 학문을 연마하여 입신양명의 대업을 이루라 하셨지. 나 역시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 여겼기에 국학(성균관)을 다니며 글을 읽었지.
그러나 줄줄이 드리운 수양버들이 높은 담을 에워싸고 교태를 부리던 봄날
(전략) 이 몸 싀어지어 / 나는 제비 될 양이면
드린 주렴 살짝 넘어 / 높은 담 넘으리라.
그 사람의 시 읊는 소리를 이는 바람결에 듣고 말았지. 결국 나는 복사꽃 하늘거리는 황혼녘 그넷줄에 달려온 대바구니를 타고서 담을 넘었지. 상상해 보시게. 동산에 떠오른 달빛 사이로 비쳐든 꽃가지의 그림자가 땅 위로 드리울 때, 대바구니를 타고 담을 넘는 광경을 말이야. 나의 열여덟 숫기가 없던 그 시절 그 사람은 열여섯, 아리따운 규방 처자였지.
- 아, 그날을 꿈엔들 잊을 수 있었겠나.
그날 밤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사흘을 넘었고, 나의 발걸음은 나를 속이고 매일 그 사람에게로 이끌어갔지.
그러나 나의 사랑은 풋사과 같은 것일 뿐이었지. 어느 날 저녁 부친께서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옴은 성인의 참된 말씀을 배우려 함이지만 너는 항상 저녁이 지나서 아침에야 돌아오니 도대체 무슨 일을 하건대 그러하냐? 아무래도 경박한 자의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을 뛰어넘어 다니는 게 아니냐? 이런 일이 만일 세상에 알려지면 남들은 모두 내 자식 교훈함이 엄하지 못하다 할 것이요, 또 처녀도 양반의 딸이라면 너 때문에 문호를 더럽힐 것이고, 남의 집에 누를 끼침이 적지 아니할 것이니 빨리 영남 농막으로 일꾼을 데리고 내려가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셨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부친의 명령이 추상같아서 소식 한 자 전하지 못한 채 쫒기듯 내려가고 말았지.
미안했네. 그 어떤 말로도... 그 무엇으로도 그 사람에게 위안이 되어 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나의 열여덟은 그렇게 무력했고.... 그렇게 부끄러웠지.....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것은 여러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지. 아, 그것도 나의 노력은 아니었네만, 단 하루도, 한순간도 잊어 본 적 없던 그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은 내 생애 최초로 맛본 황홀한 설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네.
두어 달이 지나도 내가 찾지 않는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된 그 사람이 상사의 일념으로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고, 대바구니 속에서 우리가 주고받은 시를 본 부모께서 우리 집안에 여러 차례 중매를 넣어 설득해 준 결과였지. 나의 어설픈 사랑도 우리의 설레는 혼인도 강한 이끌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터질 듯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시를 읊었지.
깨진 종이 둥글다더니 / 만날 때가 있는 건가.
은하의 오작인들 / 이 가약(佳約)을 모를 건가.
이제사 월노홍삼 / 굳게굳게 매어지어
봄바람 불어댈제 / 두견새를 원망하랴.
병에 지쳐 있던 그 사람도 기쁨을 참지 못해 시를 읊었지.
악인연인가 호인연인가 / 옛 맹세 이루려네.
어느날 님과 같이 / 꽃가마를 타고 가랴.
시녀야 날 일으켜라 / 비녀 챙겨 보리라.
우리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고, 이듬해 나는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며 출세의 길을 걸었지. 아,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아, 벗이여. 지나간 날들에 대한 고백이건만 다음 일을 말하려니 머리발이 셀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하세나.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새벽닭 훼치는 소리가 참으로 산란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