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천경자 화백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나는 그보다 먼저 화가의 고향 고흥 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다녀왔다. 입구에는 “천경자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답하는 전시가 되었으면 한다”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미술작품과 함께 ‘갑을’로 표기된 보통학교 통지표, 박경리 작가와 주고받은 사진과 엽서, 여행 스케치들이 놓여 있었다.
1924년 고흥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다져갔다. ‘색채의 마술사’, ‘영혼의 화가’라는 별칭처럼 그의 그림에는 강렬한 색과 단단한 시선이 공존한다. 불행한 결혼과 집안의 몰락, 동생의 죽음. 삶의 상처를 뱀으로 형상화한 <생태>는 그의 젊은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작품 대신 ‘유리상자 속의 꽃뱀’이라는 스케치가 걸려 있었다.
오래 들여다본 작품은 <정>이었다. 집세가 없어도 출품을 포기하지 않고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화가의 시대는 나보다 사십여 년 앞선 우리 엄마의 시간과 겹친다. 그런 시대에 ‘검은 고양이’를 그렸다는 점이 낯설었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함께 보던 선배가 말했다.
“일본풍이네.”
맞다. 일본 유학 시절에 익힌 색감과 분위기가 분명했다. 인물 뒤편에 해바라기도 보였다.
“해바라기가 시들었네. 힘든 상황을 투영한 것 같아.”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균형 없이 솟아버린 키 큰 해바라기가 머리가 무거워 땅바라기가 된 것 같아요.”
내 마음이 슬쩍 이입된 해석이었다. 화가의 의도는 아마도 선배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
새내기 농사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도 듬뿍 주고 정성을 다해 키운 해바라기가 유난히 크고 곧게 자라 뿌듯했단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지나가다 “해바라기는 너무 크면 안 돼. 잘못 키웠네” 하며 혀를 차셨다고 했다. 며칠 뒤, 해바라기는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날, 나는 그 해바라기가 생각났다. 키만 자라고 몸은 돌보지 못한 해바라기. 고개만 무거워졌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과 <여인상>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두 작품 모두 시선에 물러섬이 없었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 속 담배를 문 중년의 여인은 세상을 이미 아는 듯 여유를 띠고 있지만 눈빛은 날카롭고 매섭다. <여인상>의 젊은 그녀의 눈빛에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아가 뚜렷하다. 단정한 옷차림과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잘 칠해진 매니큐어까지 틈을 보이지 않는다. 선배가 말했다. “무섭다.”
그는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다. 1960년대에 시작한 세계 여행은 수많은 스케치와 그림으로 남았다.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와 인도, 타히티와 하와이까지 이어졌다. 사실 나는 그 화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위작 논란으로 이름을 접한 것이 전부였고 꽃과 나비 곁의 여인들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풍광 좋은 곳에서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에 마음이 끌려 찾아간 길이었다. 겸사겸사 들른 전시가 기대 이상이었다.
전시관을 나오며 선배에게 말했다.
“천경자 화백은 세상을 떠돌지 않았으면 자기 안의 열기에 먼저 삼켜졌을 것 같아요.”
“선배, 언젠가 제가 그가 걸치던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진을 보낼지도 몰라요.”
탱고의 여인처럼 말하니, 선배는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