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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니의글적글적 Aug 23. 2024

엄마의 망그러진 치킨

그 맛 일지? 맛있는 음식이야기: 치킨


 



  1980년대 나의 유년 시절, 엄마가 여행을 떠나셨던 날이 문득 떠오른다. 그 당시 ‘여행’이라는 말은 낯설었지만, 부모님은 종종 집을 비우곤 하셨다. 농번기가 끝나면 시골 어른들은 전세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관광을 다녀오셨는데, 우리 동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이 여행을 ‘기추’ 혹은 ‘기모임’이라고 부르셨다.    


  엄마가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괜스레 마음이 들뜨곤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가 여행 중에 받은 도시락이나 쥐포, 땅콩, 과자, 음료 같은 주전부리를 집으로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당시 시골에서는 간식을 마음껏 먹는 일이 드물었고, 동네 슈퍼인 구판장에 가도 간식거리가 한정적이었는데 그마저도 자주 사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여행에서 돌아오실 때면, 언니들과 함께 엄마가 가져오신 귀한 먹거리를 나누어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다려졌던 것은 바로 ‘치킨’이었다.     


  어느 날은 시곗바늘이 꼭대기를 가리킬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여행을 떠나신 엄마를 기다린 적이 있다. 두 살 터울인 언니와 나는 작은 방에 나란히 누워 치킨 생각에 들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엄마가 이번에는 치킨을 몇 조각이나 가져오실까?’ 매번 그 양이 달랐기 때문에 내 머릿속은 온통 치킨 생각으로 가득 차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엄마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곧바로 뛰쳐나갔다.     


  온 가족이 안방에 모이고, 엄마가 여행 가방을 풀면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 그 냄새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어느새 나는 엄마에게로 바짝 다가가 있었다. 용기 안에는 연갈색 튀김옷을 입은 치킨이 눅눅해져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치킨 조각을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튀김옷이 혀에 닿자,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씹을수록 은은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당시 치킨은 모양이 어떻든,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언니와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말없이 치킨을 먹었고, 엄마는 그런 우리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으셨다.




  그랬던 것이 어느덧 사십 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아이들의 치킨 먹는 모습을 보고 있다. 닭다리는 일찌감치 식욕 왕성한 두 아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인기가 없는 목 부위를 쥐고 있으면 어린 시절 치킨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결혼 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엄마는 여행에서 받아온 먹거리를 자식들에게 더 주려고, 본인은 일부러 드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나도 참 치킨 좋아하는데, 너희 생각에 참았지.” 엄마의 그 말씀이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의 치킨은 내게 단순한 음식을 넘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요즘은 전화 한 통이면 다양한 종류의 치킨이 순식간에 배달되는 세상이다. 우리 집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꼭 치킨을 먹는다. 오늘도 식탁에 앉아 방금 배달된 ‘황금올리브’ 치킨을 맛있게 먹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그 시절 눅눅해진 치킨에 담겨 있던 엄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엄마와 함께 치킨을 먹으며 느끼는 행복만큼은 어린 시절의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엄마가 남겨주신 망그러진 치킨 한 조각. 그 모습은 흐릿해졌어도, 내겐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진© gaberce,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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