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맛 일지? 맛있는 음식이야기: 컵라면
‘철컥.’
현관문이 닫힌다. 길고 긴 겨울방학의 종지부를 찍는 소리다. 드디어 3월, 개학이다. 두 달여 만에 찾아온 이 고요함이라니. 요란했던 아침 전쟁의 흔적들이 거실 여기저기 지뢰처럼 널려 있다. 벗어던진 옷가지들, 남겨진 밥그릇 하며 제 자리를 잃고 소파에 널브러진 치약까지. 평소 같으면 “어휴, 이것들이 정말!” 하고 등짝 스매싱을 날렸겠지만, 오늘은 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날이다.
온 집안 가득한 정적이 너무 달콤하다. 그래서 도로 침대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대로 누우면 정오까지 단잠에 빠져 오후 내내 허우적대다 결국 죄책감에 시달릴 터. ‘자! 여유로운 오후의 휴식을 위해 어서 움직여보자!’ 스스로 기합을 넣으며 몸을 일으킨다.
먼저 안방 침구부터 각을 잡아 정리한다. 그리곤 아이들 방으로 가 녀석들이 탈피하듯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수거한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거리를 식기세척기 안에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밀어 넣고, 유튜브프리미엄의 리드미컬한 최신곡을 배경음악 삼아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린다. 거기에 매주 월요일 정기 행사인 물걸레질과 욕실 청소까지. 숨이 차오른다. 세 시간 반의 사투 끝에 모델하우스처럼 완벽하진 않아도 집이 제법 집다운 꼴을 갖췄다. 그때 배꼽시계가 기다렸다는 듯 요란한 신호를 보내온다.
드디어 나만을 위한 ‘골든타임’이 왔다. 팬트리 깊숙한 곳, 아이들 몰래 숨겨둔 비상식량을 조심스레 꺼낸다. 어제 마트에서 6개들이 한 팩에 2,890원이라는 파격가에 홀린 듯 담았던 ‘진라면’이다. 인스턴트를 줄이기로 한 우리 집 규칙에는 어긋나지만, 이 정도 가격이라면 수행자라도 카트를 멈췄으리라. 컵라면은 혼밥 하기 귀찮은 날 꺼내 드는 나만의 히든카드이자, 위로다.
무선포트의 물 끓는 소리가 경쾌하다. 비닐을 뜯고 수프를 탈탈 털어 넣은 뒤,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붓는다. 종이 뚜껑 위를 나무젓가락으로 꾹 눌러 봉인하고 알람을 맞춘다. 식탁 의자에 턱 걸터앉아 휴대폰을 연다. 제일 먼저 화면에 뜬 ‘왕사남’ 쇼츠를 몇 편 섭렵하다가,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BTS 영상 앞에 멈춰 선다. ‘bts는 정말 감동 그 자체다’. 영상이 끝날 때쯤 알람이 울린다. 오, 타이밍 굿.
뚜껑을 열자 뽀얀 김과 함께 컵라면 특유의 치명적인 MSG 냄새가 코끝을 강타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자유로운 향기가 있을까. 젓가락으로 면발을 흔들어 수프를 골고루 섞는다. 면을 한 젓가락 크게 집어 입속으로 가져간다. 화면 속에는 다시 방탄이들이 웃고, 나도 따라 웃으며 면발을 호로록 빨아들인다. ‘크 역시! 이 맛이지.’ 짭조름하고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온몸의 긴장이 녹는다. 청소하느라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가 흐물흐물 풀리는 기분이다. 여기에 잘 익은 김치 한 점을 얹어 우적우적 씹는다. 이 순간만큼은 미슐랭 부럽지 않은 코스 요리다.(물론 미슐랭은 안 가 봤지만)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내 속도대로 즐기는 이 단출한 식탁. 누군가는 혼자 먹는 라면이 처량하다거나 건강에 해롭다고 할진 모르겠으나, 오늘 나에게 이것은 폭풍 같은 방학을 견뎌낸 훈장이자 황홀한 전유물이다. 컵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국물을 들이킨다. 속이 든든하다. 단 5분 만에 끝난 이 짧고 강렬한 성찬.
‘휴우-.’ 빈 컵을 치우며 길게 숨을 내뱉는다. 몇 시간 뒤면 다시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 배고파!”, “엄마, 이것 좀 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응.”, “그래.”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제발 엄마 좀 그만 불러!” 하고 소리를 칠지도.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은 비밀스러운 컵라면 한 그릇으로 이미 에너지를 풀충전했으니까.
그러니, 이제 다시 움직여볼까? 세탁기가 나를 부른다. 다음 라운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