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적응, 문화, 사회와 개인, 정상성과 비정상성
2018년, 검찰청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아스팔트 도로가 일렁거릴 정도로 무더운 여름이 되었고, 나는 매우 당연하게도 여름 의상인 반바지와 반팔을 입고 출근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하는 출근길이었음에도, 사무실에 도착하면 이미 땀 범벅이 되었을 정도로 유난히 더웠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총무과장님께서 나의 복장을 보시고는, “내일부터는 반바지 입고 출근하면 안 됩니다. 단정한 복장으로 출근하세요.”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에 나는 “여름이라 더운데 반바지가 왜 안 되나요? 반바지는 단정하지 않나요?”라고 대답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MZ’스러운 상황으로, 세대차이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로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겠으나,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검찰청이라는 집단, 더 범위를 늘려 대한민국의 공직사회 및 문화와 저항적 개인의 대립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 사례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서 개인의 저항이 문제, 즉, 비정상성(abnormality, 특정 문화가 행동의 스펙트럼에서 가져와 정상이라고 선언하는 '정상성' 개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음)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저항적 개인은 특정한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보편적으로 수적 규모에서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회’는 문화를 통해 저항적 개인을 통제하고 적대시하며, 심한 경우 ‘혐오’한다. [문화의 패턴]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그녀의 책에서 “사회들은 언제나 그들이 좋아하는 전통적 형태를 정당화해왔다”, "문명의 제도가 뒷받침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 전통적 형태가 ‘정상성’을 판별하는 기준점이 된다. 즉, 특정 집단이 오랜 기간 선호해왔고 그들의 익숙한 생활 방식으로서 전승되어 온 사회의 문화가 해당 사회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하는 저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립하는 저항적 개인의 입장에서는 소위 '사회부적응'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합리적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두가 더운 여름에 긴 바지보다 시원한 반바지를 입으면 훨씬 편할 텐데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경우 보통 저항적 개인에 대해 “개성이 강하다”, 또는 “사회생활 못하겠네”, "정말 별종이다" 등, 그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처럼, 심지어는 잘 못 배워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베네딕트의 말을 빌리자면, 반바지를 원하는 그들은 그저 "문화의 전통적 형태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예외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부적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사회와 개인 양 측의 입장이 모두 이해되는 현 상황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회부적응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를 문화를 통한 사회의 통제, 그리고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민해보려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논의할 때 문화를 언급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과 떨어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어떤 개인도 자신이 참여하는 문화가 없다면 출발점에 설 수" 없다. 또한, "어떤 문화도 결국에는 개인이 공헌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즉,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대립보다는 상호구성, 상호의존 또는 상호영향의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사회와 개인의 관계라는 이 논쟁은 굉장히 익숙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이 책이 출판된 해가 1934년, 약 90여 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류학의 성장과 함께 매우 뜨거웠던 해당 논쟁에 대해 중요한 한 축의 주장을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해당 논쟁은 '익숙할 뿐'인 것이지,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회는 개인과 대립적이며,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주로 개인은 사회에 의한 '피해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일반인은 여전히 사회와 개인을 대립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대체로 이것은 우리 문명에서 사회의 규제 행위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민속적 전통의 관행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통은 특정한 행동 양식을 통해 개인의 자율성을 해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식사를 해야 하는 것, 장남이 우선시 되는 것부터 대한민국 사회 내의 전통적인 부모 자녀간 관계, 복장에 대한 논쟁, 고전적 사내 문화 등, 많은 영역에서 대부분의 개인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인위적으로 맞추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바꿔 말하면 '적응'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즉,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보는 경우, 이 '적응'의 과정을 사회의 규제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결국 사회 '적응'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가능성 또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대부분의 개성은 인간의 뛰어난 적응 능력 덕분에 그 문화가 요구하는 형태대로 빚어지는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이 태어나는 사회의 조형하는 힘에 유연하게 적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네딕트는 완전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성 마저도 문화와의 관계에서 문화의 힘에 의해 조형된 것이라 보고, 그 원천을 인간의 적응력으로 보고 있다. 즉, 개인의 기질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회와 문화에 적응하는 방식 또는 정도가 모두 다를 것이며, 이에 따라 각기 다른 개인의 '개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베네딕트는 "사회 구성원 전원이 하나 같이 그것을 자신의 체질에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면서, 잘 적응한 구성원들이 해당 사회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가 결코 그들의 본질적인 기질이 사회 및 문화에 이미 합치되었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적응'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에게 그다지 편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MZ라는 용어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지배적인 키워드로 사용된 지 벌써 약 5년 정도가 되었다. 'MZ'라는 키워드의 시작은 M세대(Millenium세대, 2000년에 성인이 된 인구집단을 의미)와 Z세대(스마트폰 및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해당 환경에 익숙한 1997년~2010년대 후반 출생 인구집단을 의미)의 무분별적 결합에 기인한다. 대표적으로 대학내일 20대 연구소의 '트렌드 MZ 2019'에서 처음 MZ라는 용어가 주요 주제로 등장하면서, 당시 인구학적 용어에 익숙치 않았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M세대와 Z세대, MZ세대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증가했다. 이에 더해 뉴스, 미디어, 콘텐츠 등 많은 정보 전달 매체에서 MZ를 핵심 키워드로 내세우면서 명실상부 조회수 치트키가 되었으나, 그 파급력으로 인해 전통, 조직문화, 사회현상 등 많은 분야에서 갈등 유발 요인으로서 인식되기도 했다. (나무위키를 통해 정리한 내용이라 개별적으로 추가 확인해보기 바란다). 여튼 중요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MZ라는 용어를 통해 '사회부적응'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MZ는 현 시점에서 사회부적응의 대표격으로 인식된다(사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에피소드를, 존재하지도 않는 MZ세대로 묶어 일반화 하는 것이 전제로 깔려있으며 이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 해당 키워드가 대중에게 잘 인식 및 공유되어 있는 점에 집중하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코미디 프로그램 SNL의 'MZ오피스' 코너 프로그램에서는 해당 부분을 극대화하여 유머로 꼬집었다. 에어팟을 껴야 업무 능률이 향상되는 '맑눈광' 막내, 회사 근무시간에 Vlog를 촬영하는 '주대리' 등, 다양한 MZ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던 새로운 사무실의 분위기가 그려진다. 특히 대부분의 상황에서, 같은 세대지만 MZ 캐릭터들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는 김원훈 대리의 속마음이 유머코드를 만들어 내면서, 기본적으로 이들이 조직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개성이 너무 강한 '유난스러운' 캐릭터로 보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물론 이런 점들이 대부분 시청자들의 공감대와 일치하면서 'MZ오피스'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콘텐츠의 영역이지, 실제 사회에서는 이와 다소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유연 근무제, 자율복장, 재택근무 활성화 등, 과거에는 생각해 볼 수 없었던 많은 부분에서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그렇지만 실제 입고 다닐 수 있냐는 다른 문제다.). 기존의 조직 측에서도 MZ의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부적응으로 여겨지던 부분에, 기존 사회의 지배적 문화에 저항하는 대안적 집단의 문화가 금(crack)을 낸 것이다. 예전에는 안 되던 것들이 이유를 불문하고 허용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은 경영진의 기업 운영 전략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행동의 변화를 통한 사회문화적 변화 가능성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론에서 사회부적응이라는 용어는 각종 묻지마 범죄, 고령 노인의 부적응 문제, 청소년의 따돌림 문제 등, 특징적인 몇 개의 환경이나 사회적, 제도적 개선 촉구를 위한 거시적 영역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 내에도 수많은 하위 사회들이 존재하며, 각 사회는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 적응과 부적응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일상의 매 순간 나타나고, 우리는 그럴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MZ는 사회부적응인가?'라는 질문도, 'MZ는 일상의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다른 이들과 달라 조직 문화와 사회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 하는 개인들이 있다. 이들에게 기존 문화는 마치 정답으로 인식되어,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하면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며 굉장히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불행은 그의 타고난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런 자질의 배출구를 마련해 주지 못한 문화의 탓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부족과 나의 잘못으로 인해 사회의 일반 상식선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하나의 능동적 선택이자 자율성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런 경우 당연히 그 이후에 나타나게 될 나비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도피이며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 전반에 대한 무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고민과 선택, 감내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점차 내면이 단단한 인간으로 성장해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시 고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