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얼굴을 한 저 깊은 곳의 검은 탐욕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갔나
석유가 분출되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마치 저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검은 욕망이 마침내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의 형상으로 자본을 향한 욕망의 상승, 자본를 탐하는 이들의 추락을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자본을 탐하게 되어 가장 적나라하게 추락하는 인물은 다니엘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을 단순히 욕망에 지배된 표면적인 인물이 아닌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입체적인 인물로 느낀다. 그 이유는 그의 아들의 존재이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면서 우리가 공감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소재이다. 현재에 이르러서 대중들이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신파의 중심에는 가족 간의 사랑, 특히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소재는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단순히 표면적인 관계성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다니엘의 아들은 관객이 다니엘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하는 장치이자 그의 마지막 비극적 인간성을 상징한다.
이 영화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생각해도 다니엘과 아들의 관계는 모든 관객에게 인간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초반부 다니엘은 사업에 온 정신이 팔리면서도 동시에 아들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아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설명해주고 아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해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곧 황량한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무언가가 그를 검게 물들인다.
석유 사업이 점점 커짐에 따라 다니엘은 큰 변화를 갖는다. 아들이 이로 인해 청력을 잃고 자신에게는 큰 죄책감을 뜻하는 존재가 된 것, 그리고 그는 사업을 위해 아들을 다른 곳으로 맡기는 결정을 한다. 이를 기점으로 다니엘은 자신에게 인간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를 떠나보내고 검은 것에 물들기 시작한다. 아들과 재회했을 때 다니엘에게 이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고 아들의 눈에서도 성공한 거대 사업가로서 남고 싶은 것뿐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을 비극으로 내몰았던 석유라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돈이 가장 큰 가치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비극적인 측면을 상징하면서도 그 형상에 의미가 있다. 석유는 황량한 사막과 같은 땅에서 찾기만 해도 압도적인 부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영화의 시대에서는 희박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더욱 집착했다. 석유는 분출할 때에 검은 액체가 하늘로 떠오른다. 이는 숨겨왔던 검은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주변을 더욱 자본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배우 폴다노가 연기한 폴 선데이는 신앙적인 인물을 나타낸다. 적어도 중반부까지는. 신앙은 가장 성스러운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악한 것으로부터의 오염을 배척한다. 이단, 욕구 등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종반부에 이르러서 폴의 고백은 그 신앙심마저 자본에 삼켜진 것임을 암시한다. 오염되어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신념이 검은 욕망에 오염되고 한 인간을 타락시킨 것이다. 사회에서 자본이 상징하는 메커니즘은 사회 전체를 움직이기에 부정할 수 없고 그렇기에 더더욱 힘을 얻는다. 폴은 사회에서 자본의 힘의 척도를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인물들은 어떤 끝을 맞이했을까, 누군가는 가족을 잃었고 청력을 잃었으며 누군가는 신앙심을 잃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주인공들이 자신을 믿게 했던 모습들을 잃고 결말에서는 처연한 끝을 바라본다. 결국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검은 욕망의 분출로 시작된 이야기들에서 인물들은 반대로 욕망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간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