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서 일단 썼습니다

by 피아니스트조현영


<영화 ' 피아니스트의 전설'> 중에서


힘들어서 일단 썼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자가 치유였습니다. 전공은 피아노예요.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했고, 그 공부로 삶이 윤택해질 거라고 믿었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들고 한국에 들어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0여 년을 보냈지요. 그러고는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교수가 되지 못한 대학강사의 운명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저의 시한부 생명은 30대 끝 언저리에서 끝났습니다. 그러고는 할 일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방황했습니다. 겉보기엔 좋지만 현실의 예술가는 취업이 절박합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낸다고 해결되지는 않아요. 할 줄 아는 게 피아노 밖엔 없는데, 소속이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레슨이라는 부업도 소속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에요. 제 이름 석 자보다 저의 소속이 훨씬 힘을 발하는 사회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물론 자비를 들여 뭔가를 기획할 순 있지만, 일을 벌인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제겐 가정이 있고, 키워야 될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투자를 할 돈도 없었지만, 아이도 키워야 했기에 돈을 벌 수 있는 명백한 사유가 있지 않고서는 아이를 두고 나갈 수 없었어요. 정말 30대 후반의 애 딸린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많지 않더군요. 그래서 저는 우울했고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제껏 난 뭘 한 거니...'

저의 지난 세월이 유리처럼 깨진 것 같아 가슴 아팠습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면 되지 무슨 엄살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살림도 육아도 뛰어나지 못했던 제게 가정주부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글쓰기는 시작됐습니다. 애를 키우면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글을 쓰는 것 말고는 없었거든요. 힘들어서 일단 썼습니다.


나의 글쓰기 이력


저의 글쓰기는 어릴 적 일기부터 출발합니다. 처음엔 엄마의 강요로 쓰기 시작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썼던 편지, 그리고 유학할 때 기록한 레슨 일기를 거쳐 이제는 힘들어서 쓰기 시작한 신변잡기와 음악에 관한 글이 저의 글쓰기 이력입니다. 사진을 잘 찍어 올리거나 대단한 이슈를 적은 글은 아니었기에 남의 시선을 끌기에도, 책으로 엮기에도 부족한 그런 글이었습니다. 그래도 거의 날마다 썼습니다. 일기장에도 썼고, 컴퓨터 한글 파일에도 썼고, 조금 용기를 내어 인터넷 플랫폼에도 썼지요. 공개로 올린 글은 많지 않지만 끄적여 놓은 글들이 태산처럼 쌓여 갔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썼고, 어떤 날은 한낮에 아이가 잠들 때 울면서 썼습니다. 일하고 싶은 데 일을 할 수 없는 상황들에 한탄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아이가 크면 나도 나이가 들 텐데 그땐 지금보다 더 일할 기회가 줄어들 텐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효용을 생각하며 나의 쓸모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다독이고 울다 웃다 그랬어요.


그렇게 그냥 마구잡이로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나니 글을 잘 쓰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글이 좋은지, 왜 인기가 있는지, 그들은 어떻게 쓰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긴 했지만, 수동적으로 책을 읽는 것과 읽힐 책을 쓰는 일은 완전 다른 일이었어요. 읽을 땐 몰랐는데, 막상 누군가에게 읽힐 문장을 쓰려니 한 문장이 나가질 않았습니다. 제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글이 뭔지 고민하게 됐어요.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난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닌 제게 어떤 쓸거리가 있는지... 결국 전 제가 사랑해서 공부한 음악, 클래식 이야기를 집중해서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클래식은 불편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추상적인 음악을 글로 쓰려니 다른 글을 쓸 때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음악에 관한 글을 재밌게 쓰려면 예술가들의 사생활을 들쳐야 하는데 전공자 입장에서 그런 글을 쓰는 건 마음이 아팠거든요. 자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각자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음악이 팩트지 그들이 사생활이 팩트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스캔들이나 드라마틱한 내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진심이 담긴 글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쓰는 연습을 하면서 무료 칼럼을 써보기도 했고, 브런치도 알게 됐습니다. 브런치에서는 글이 우선이라는 느낌과 제가 작가로서 쓰고 있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조회수나 구독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신변잡기에서 좀 더 전문적이고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쓰다 보니 점점 형체가 갖춰졌어요. 이제 그저 글을 쓰는 일에서 벗어나 출간 작가가 되고 싶어 졌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어요


작가라는 직업은 저와 다른 사람들이 갖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창의력 풍부하고, 상상력 넘치며, 뭐든 척척 써내는 사람들만 작가라는 호칭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석 자 박힌 책을 쓰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그리고 작가님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불릴 때 들리는 소리가 좋았습니다. 대표님, 사장님, 기자님, 선생님, 교수님, 박사님, 사모님, 부장님, 피디님, 작가님! 단어 끝에 ‘님’ 자를 붙여 만든 단어 중 가장 경쾌하고 뭔가 있게 들리는 단어 ‘작가님’! 아무튼 작가는 멋있어 보였습니다. 작가는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고, 늙어서도 할 수 있고, 글만 잘 쓰면 이력서가 필요 없이 나의 글 자체가 이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쓰다 보니 피아노를 치는 것과 글쓰기의 공통점을 몇 가지 발견했어요. 첫 번째는 재능도 100%, 노력도 100%가 필요한 일이란 것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지독한 연습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들어요. 두 번째,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아무나 성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 혼자 앉아서 자신의 음악을 들어야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글은 여러 사람에게서 글감을 얻지만 결국 혼자 씁니다. 네 번째, 일이 년 한다고 결판나는 일이 아닙니다. 피아노도 글쓰기도 한두 시간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게 아디거든요. 다섯 번째,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생각을 소리로 표현을 해야 의미가 있어요. 일단 연습을 시작해서 소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글쓰기도 써봐야 느는 것처럼요. 이론만으로는 실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아이와의 기억이 소중했던 시간>
<오늘, 당신의 기분은 어떤가요...>

글을 쓰면서 제 생각도 정리하고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면서 지식의 양도 늘어나니 여러 모로 좋았습니다. 이제 이 글쓰기가 작가라는 직업으로 조금이라도 밥벌이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업 작가로 사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제 이름 박힌 책을 발판 삼아 일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펼치며 공모전에도 응시하고 출판사에 투고도 해봤습니다. 매번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아니지만 글쓰기 과정과 도전의 단계를 거치면서 다양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누군가는 칭찬과 격려를 해줬고, 누군가는 혼자 보는 글이라고 다시 써보라고도 했어요. 어떤 날엔 커서만 깜박인 채 하루를 다 보냈고, 어떤 날엔 너무 잘 써져 기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음 날 아침 다시 읽어보면 밤새 써둔 글이 유치 찬란해서 다 지우기도 했고요. 햇볕이 드는 날도 있었고, 비가 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지금은 자식 같은 몇 권의 책을 세상에 낳았고, 여전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단한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그 책들은 그 시절 저의 결과물입니다. 지금도 글을 쓰면서 약간은 힘들고, 약간은 괴롭고, 약간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많이 설렙니다. 얼마 전 브런치를 통해 출판사 두 곳에서 집필 제안을 받았습니다. 생각보다 구독자가 늘지 않아 브런치 활동을 잠시 쉬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배웠습니다. 조회수나 구독자가 많지 않아도 꾸준히 좋을 글을 써내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재능이 많은 것을 좌지우지하지만, 결국은 연습해야 발전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오로지 평범한 사람만이 발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위인이 해준 이 한 마디가 평범한 저에게는 무척 위안이 됩니다.


솔직하고 편안하며, 공감을 일으키면서도 독창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글은 단박에 써지지 않아요. 글을 쓴다는 건 시간을 담그는 일입니다. 음악도 시간이 무르익어야 좋은 연주가 탄생해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쓰고 고칩니다. 그리고 시간을 담그는 연습을 합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산소호흡기 같은 존재예요. 더 이상 숨을 못 쉴 것처럼 답답할 때 살게 해주는 그런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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