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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니스트조현영 Dec 08. 2021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10월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 2악장

 #클래식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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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되면 꼭 듣게 되는 그 유명한 노래는 분명히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 있다고 했건만! 그런 멋진 날을 맞이하고 싶은 제 바람과 달리 현실적으로 저의 10월은 일 폭탄입니다. 이래저래 쌓인 일을 해결하느라 하루하루 숨가쁘고 있어요. SNS에 올라오는 타인의 멋진 휴가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 가을 오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10월은 어떠신가요?


돌이켜보면 저의 10월은 항상 바쁘고 버거웠어요. 결혼 전에는 특별히 10월에 몰려있는 연주를 하느라 바빴고, 주말마다 친구들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숙제를 치르느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걱정과 불안을 견뎌야 하기도 했고요. 비로소 평온했던 시간은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였어요. 결혼이라는 장치 덕에 부모님의 걱정 어린 눈초리를 피해 갈 수 있었고 분신처럼 챙겨야 할 아이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시간을 아주 자유롭게 쓸 수 있었죠. 


24시간이 전부 나를 위한 시간이고,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꽤 괜찮은 시절이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여행 등 ‘혼자만의’라는 형용사는 어느 명사와도 가능한 조합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습니다. 여자들은 엄마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고 남자들은 가장이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죠? 야근에 지친 2, 30대 직장인도, 엄마와 아내 역할에 숨가쁜 3,40대 여성들도 현실의 삶을 잠시 잊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작곡가 브람스를 떠올려요. 브람스는 매년 여름휴가 때마다 스위스의 툰 호수를 찾았습니다. 그에게 툰은 자기만의 케렌시아였죠.


브람스의 케렌시아


케렌시아(Querencia)란 스페인어로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또는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을 말한답니다. 그렇죠. 우린 누구나 다 자기만의 케렌시아를 그리워하고 바랍니다. 브람스의 케렌시아인 툰은 4개의 숲이 어우러진 호수가 있는 도시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생각을 비우고 즐기기 좋은 도시예요. 제가 2018년에 아이와 함께 간 여행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였고, 다시 여행 가고 싶은 단 한 곳을 선택하라면 망설이지 않고 떠날 도시입니다. 교통이 불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적적해서 고립된 느낌이 들지도 않으면서 언제든지 호젓하게 편안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에요. 사방이 초록으로 물들어서 저절로 안구정화가 되는 도시입니다. 


융프라우를 올라가기 위해 들르는 도시 인터라켄에서 유람선을 타고 툰 호수를 따라 내려오면 툰 중앙역에 도착하는데요, 툰 호수를 한번 건넜다는 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충분합니다. 호수를 따라 내려오는 그 길에 마주치는 툰의 정경은 한 편의 파노라마 그 자체예요. 저는 한강에서도 안 타본 유람선을 멀리 스위스 툰에 와서 처음 타봤어요. 유레일패스 소지자는 인터라켄에서부터 출발하는 유람선을 무료로 탈 수 있는데, 알프스를 바라보며 유람선을 타는 기분은 기대보다 훨씬 감동이었습니다. 햇빛이 사각사각하니 유리처럼 빛나는 날에 바람을 맞으며 호수를 내려가는 기분이란 정말 황홀했습니다. 지금도 그 촉감을 잊지 못하겠어요.


여행을 가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합니다. 기분은 좋은 상태고 마음의 여유를 누리겠다는 다짐도 되어있으니 모든 게 느긋합니다. 툰 호수는 그런 다짐을 실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에요. 날씨까지 도와주면 물결 따라 바람 따라 앞으로 나가는 유람선이야말로 천국행 티켓입니다. 거친 파도가 아닌 잔잔한 물결이 적당한 진동을 느끼게 하면서 기분 좋아집니다. 중간중간 배가 정박하는 곳곳에는 사람들이 햇볕을 몸에 바르려고 모두들 나와서 누워있어요. 이곳에서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의무마저 느껴집니다. 브람스도 이곳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 이상이 없는 그곳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 독일)는 툰에 머물면서 엄청난 곡들을 작곡했습니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여름휴가를 툰 호수에서 즐기면서 첼로 소나타 2번 F장조 op.99,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 op.100, 피아노 3중주 3번 c단조 op.101,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 a단조 op.102를 작곡합니다. 정말 한 곡도 아니고 무려 연달아 네 곡이나! 작곡가 브람스의 열혈팬으로서 대체 호수의 어떤 점에 반해서 그 명곡들을 작곡했는지 음악가 입장에서 무척 궁금합니다.


 툰 호수에서 작곡됐다는 첼로 소나타 2번은 저의 인생 클래식입니다. 전체 4개의 악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2악장은 가슴을 후벼 파는 매력이 있어요. 브람스라는 작곡가는 독일 북부 항구도시인 함부르크에서 태어나서인지 성격이 내성적이고 무뚝뚝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고독을 즐겼던 브람스였죠. 그는 자발적 아웃사이더였어요. 그런데 그런 브람스가 이곳 툰 호수에서는 자기 방어 성격을 모두 해제시켜 버립니다. 브람스 음악답지 않게 밝고 경쾌한 부분도 있으면서 2악장은 감미롭거든요. 생각 많고 진지한 브람스가 여름휴가를 스위스에서 보내면서 많이 달라집니다. 


 브람스 첼로 소나타는 총 2개인데 1번을 작곡하고 20년 뒤에서야 2번을 작곡합니다. 아마도 20년 동안 브람스의 머리에는 첼로 소나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찼을 텐데, 툰 호수에서 답을 찾은 것이겠지요. 작곡가가 작곡을 한 순서대로 정리해서 번호를 붙이는 것이 작품번호 Op인데, Op.99번이 첼로 소나타 바로 이어서 Op.100인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을 작곡한 것을 보면 그동안의 아이디어가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진 겁니다. 따뜻한 음색의 첼로 소나타를 듣다 보면 툰 호수의 물살이 현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아요. 그 시절 브람스도 저 물결에 그렇게 빠진 거겠지요.     


10월 아무것도 한 하고 싶은 달에 문득 브람스가 그립습니다. 보통의 여행에서는 최대한 많은 곳을 가보고 최대한 많은 것을 하려 했다면 툰에서는 그런 계획은 무의미합니다. 툰에서 브람스의 작곡은 일이라기보다는 놀이였을 겁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혼자서 그렇게 다작을 했다는 건 오롯이 음악에 빠져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느꼈던 덕입니다.


여러분 지금 저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면 귀에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꽂고 눈을 감아보세요. 파란 물색의 툰 호수가 눈앞에 펼쳐질 거예요.


https://youtu.be/UvEgmpvZsqI

브람스 첼로 소나타 2번 2악장 바장조 아주 느리고 정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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