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벳으로 읽는 유럽사

프랑스 대혁명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시대

by 최인성

유럽 역사에는 한 왕가가 대륙 전체의 정치와 운명을 좌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거대한 존재감을 남긴 두 왕조들이 있다. 먼저 합스부르크 가문이다. 이 왕가는 수세기 동안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 오스트리아 황제와 헝가리 왕까지 다양한 왕위를 차지했다. 또 다른 왕가는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다.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이 왕가는 합스부르크와 오랫동안 경쟁하며 유럽 정치의 한 축을 이루었고, 오늘날 스페인 왕실의 왕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왕가들의 역사 속에는 서로 다른 시대를 상징하는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로 태어나 프랑스로 시집갔지만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 왕비였다. 다른 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이다. 바이에른 왕가 출신 공주였던 그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후가 되어 쇠퇴해 가는 제국의 시대를 살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여성의 삶이 오늘날 모두 뮤지컬이라는 장르로 다시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마리 앙투아네트와 오스트리아 황후의 삶을 그린 엘리자벳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속에서 왕정이 무너지는 시대를 다루며, 그 속에서 루이 16세와 왕실의 운명을 보여준다. 반면 엘리자벳은 유럽의 오래된 제국이 서서히 균열되는 과정을 통해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시대를 비춘다. 이 글에서는 두 뮤지컬 속 인물과 실제 역사 속 인물의 차이,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둘러싼 유럽의 국제 정세를 함께 살펴보려 한다.


1. 마리 앙투아네트 :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


1.1 마리 앙투아네트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그녀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민중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는 비극적인 왕비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 마리 앙투아네트는 훨씬 더 복잡하고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유럽 정치에서 매우 영향력이 컸던 오스트리아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 왕가와의 혼인을 통해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전략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어린 딸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외교적 카드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 세월 서로 적대하던 라이벌 국가였는데 18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정세가 변하면서 두 나라는 동맹을 맺게 된다. 이 동맹을 상징하는 정략결혼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왕세자 루이의 결혼이었다. 겨우 열네 살이던 그녀는 프랑스로 시집을 가서 훗날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다. 문제는 그녀가 프랑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정치적 의심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궁정과 민중에게 오스트리아 출신 외국 왕비라는 이유로 강한 반감을 샀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의 오랜 적대국 오스트리아에서 왔으니 반 오스트리아 감정이 프랑스 국민들 내에서 엄청나게 심했다. 여기에 궁정 생활도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베르사유 궁정 내부는 복잡한 의례와 권력 경쟁이 뒤섞인 세계였다. 젊은 왕비였던 그녀는 이러한 궁정 정치에 익숙하지 않았고, 점차 궁정의 규율보다 개인적인 취향과 사생활을 더 중시하게 된다. 그녀는 화려한 의상과 파티, 연극과 사교 모임을 즐기고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던 프랑스 민중에게는 사치스러운 왕비의 이미지로 비쳤다. 게다가 뮤지컬에 나온 내용처럼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으로 이미지가 악화된다. 그 사건의 주범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었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평판이 나빠진 것이다. 물론 많은 비난은 혁명 선전에 의해 과장된 부분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명한 문장인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이 말은 실제로 그녀가 한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 명대사를 했다고 알려지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 성격과 다르게 후대에 악녀의 대표 이미지로 전해진다. 혁명 선동과 정치적 공격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점점 악화된다. 그러나 혁명기 프랑스에서 그녀는 구체제의 상징이 되었고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혁명 선전과 정치적 공격 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점점 악화된다. 실제 성격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평가가 비교적 일치한다. 그녀는 매우 사치스럽고 민중들의 가난을 이해 못 하는 기득권의 인물이라기보다 뮤지컬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처럼 비교적 솔직하고 감정적인 성격이었고 정치적으로 능숙하지 않았으며 궁정 생활을 벗어나 개인적인 자유를 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에는 개인의 성격보다 상징적 위치가 더 중요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대혁명의 시기에 프랑스 구체제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1793년 그녀는 혁명 재판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파리 혁명광장에서 뮤지컬의 한 장면과 똑같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왕비의 처형은 유럽 왕정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2 루이 16세

뮤지컬에서 루이 16세는 매우 인간적인 왕으로 묘사된다. 권력을 탐하는 폭군이 아니라 선하고 온순한 가정적인 아버지이며 나라와 국민들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했다. 그는 왕으로 태어났지만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고 궁정 정치와 귀족 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뮤지컬에서도 그는 종종 이런 모습으로 등장한다. 왕으로서 책임을 느끼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는데 루이 16세는 성격이 온순하고 가정적인 남자였고 학문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그는 자물쇠 제작에 큰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가 통치해야 했던 프랑스의 상황이었는데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져 있었다. 선대 왕들부터 이어진 심각한 사치와 막장 정책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웠는데, 여기에 루이 16세는 적대국 영국을 곤란하게 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을 과도하게 지원하여 국가 부채가 심했다. 게다가 귀족과 성직자의 면세 특권 농민과 도시 민중의 생활 악화로 프랑스 왕국의 재정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루이 16세는 세금 개혁을 추진했으나 왕을 우습게 보던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모든 개혁은 실패한다. 결국 그는 삼부회를 소집하는데 이 결정이 바로 프랑스혁명의 시작이었다. 왕은 삼부회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많이 알려진 것처럼 제3 평민 신분이 테니스코트의 맹세를 하고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며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다. 루이 16세는 혁명군에게 따를 수밖에 없었고, 처갓집인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다가 뮤지컬의 내용처럼 국민들에게 잡히기도 했다. 잡힌 이후 루이 16세는 튈르리 궁에서 스위스 용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되었는데, 후에 이 궁전에 분노한 시민군이 쳐들어왔다. 이때 스위스 용병들에게 자신을 보호하지 말고 도망가라고 명령할 정도로 사람은 좋은 왕이었다. 이 용병들은 루이 16세의 명을 듣지 않고 시민군에게 전멸한다. 이 사건 이후 루이 16세와 왕가는 의회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지만, 의회는 시민들에게 루이 16세와 왕가를 넘겨준다. 결국 1793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며 나라는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후에 나폴레옹이 집권하며 잠시 안정을 찾는다. 프랑스 역사에서 왕이 공개적으로 처형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뮤지컬을 본 사람들 중에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분명 루이 16세는 무능하게 처형당한 암군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루이 16세의 실제 성격은 뮤지컬 내용과 많이 일치한다고 한다. 선하고 가정적이고 똑똑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싶어 했으나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루이 16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상징적 사건에서 처형당한 왕으로 기록되는 바람에 후대에 암군처럼 기억된 것이다.


1.3 오를레앙 공

뮤지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정치 인물은 오를레앙 공이다. 그는 왕족으로 왕 루이 16세의 친척인데도 왕실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을 이용해 권력을 얻으려 한다. 그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다. 작품 속에서 그는 냉소적이고 계산적인 정치가인데, 민중의 분노를 이용하고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려 한다. 이 설정은 실제 역사와 꽤 가까운 편이다. 그는 루이 16세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면 그는 파리 시민들과 친하게 지냈고 자신의 궁전을 정치 토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혁명이 시작되자 그는 평등한 필리프 (풀 네임이 루이 필리프라서)라고 부르기 시작하는데 이는 귀족 신분을 버리고 오를레앙 공이 민중과 함께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 계산적인 인물은 사촌 형 루이 16세의 사형투표 때 잔인하게 찬성표를 던졌다. 이것은 혁명 속에서 힘을 키워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 싶다는 (더 크게 보면 왕이 되고 싶다는) 계산이었으나 그의 계산은 오래가지 않았다. 혁명은 점점 급진화되었고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되어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 자체가 위험해졌다. 결국 그는 혁명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루이 16세처럼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런데 아니러니 하게도 오를레앙 공은 죽었으나 그의 아들 루이필리프 1세가 살아남아 후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으로 유명한 1830년 7월 혁명 때 프랑스 왕이 되어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게 된다.


1.4 자크 에베르

뮤지컬에서 민중 혁명 대표는 거리의 선동가로 혁명의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자크 에베르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 그는 민중의 굶주림과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 역시 실제 역사에 존재했다. 에베르는 혁명기 파리에서 성직자와 귀족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던 매우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었다. 그가 발행한 신문은 기득권을 비판하여 민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프랑스의 자코뱅파에 합류하였다. 알다시피 자코뱅파는 공포정치를 주도한 로베스피에르가 있던 정당으로 급진 혁명가 클럽이다. 그는 점점 더 왕정 완전 폐지, 귀족 숙청, 급진적 공화정처럼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했다. 그러나 혁명은 내부에서도 갈등을 낳는데 에베르는 너무 급진적이고 더 심한 공포정치를 주도했고 그 무서운 로베스피에르가 부담스러워할 정도였다.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거짓 악성 선동에도 가담했다. 에베르는 위에서 언급한 튈르리 궁 습격사건과 반대파인 지롱드당에 대한 공격등 과격한 정치를 지지하여 로베스피에르와 충돌했고 에베르는 로베스피에르 파에게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혁명과 개혁을 원했지만 공포스럽고 과격하고 악한 이 거짓말쟁이 선동가의 최후는 비참했다.


1.5 페르젠 백작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스웨덴 출신 페르젠 백작은 왕비의 불륜상대로 등장한다. 그는 왕비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돕는 낭만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작품에서는 왕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고립될 때 페르젠이 그녀의 유일한 이해자처럼 묘사된다. 이 설정은 단순한 극적 장치만은 아니었고 페르젠은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매우 가까운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있는데 뮤지컬처럼 불륜이었는가 그저 친구였는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페르젠은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본국 스웨덴으로 돌아갔고 1810년 스웨덴 왕세자 사망을 둘러싼 분노와 정치적 의혹 속에서 민중들에게 집단린치 당해 살해당한다.


1.6 마담 랑발

뮤지컬에서 마담 랑발은 왕비의 곁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친구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가까운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왕비는 그녀를 매우 신뢰하여 궁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친밀한 관계는 오히려 마담 랑발에게 해가 되었는데 혁명기 프랑스에서는 왕비의 주변 인물들까지 민중의 증오 대상이 되었다. 파리에서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자 왕비의 친한 친구인 마담 랑발은 체포되어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죽음은 매우 잔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뮤지컬에서 마담 랑발이 참수되고 그 머리가 꼬챙이에 꽂혀 마리 앙투아네트가 보고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성난 군중들이 죽은 마담 랑발의 머리를 창끝에 꽂고 거리를 행진하여 그녀는 편하게 잠들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사건은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1.7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역사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프랑스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그때부터 프랑스는 더 긴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왕정이 무너진 뒤 프랑스는 공화국을 세웠지만, 혁명은 곧바로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가 주도한 공포정치는 수많은 피를 낳았고, 결국 혁명은 스스로의 급진성을 견디지 못한 채 내부 붕괴를 맞는다. 이 혼란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그는 혁명기의 군사적 혼란 속에서 빠르게 출세했고,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렸지만, 그 혁명의 폐허 위에서 다시 한 명의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제국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럽 대륙 대부분을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러시아 원정 실패와 연이은 전쟁 끝에 몰락한다.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다시 부르봉 왕가의 복고 체제로 돌아간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혁명 이전으로 완전히 되돌아간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왕이 돌아왔어도 혁명으로 프랑스 시민들이 한번 경험한 자유주의와 시민사회의 맛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긴장은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폭발한다. 돌아온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가 반동적 통치를 강화하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고, 왕은 또 쫓겨난다. 이 혁명은 외젠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7월 혁명 이후 왕위에 오른 사람은 앞서 언급한 오를레앙 공의 아들 루이필리프 1세였다. 그는 절대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을 자처하며 시민계급과 타협하는 입헌군주로 등장했지만 이 체제 역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1832년 파리에서는 공화주의 청년들과 시민들이 다시 봉기한다. 이 사건은 규모 면에서는 1789년이나 1830년에 비해 훨씬 작았지만, 상징성은 매우 컸다. 왜냐하면 바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이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종종 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작품으로 오해되지만, 실제 배경은 1789년이 아니라 이 1832년 봉기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정 붕괴의 시작을 다룬다면, 레미제라블은 혁명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불안정한 흐름은 다시 한번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진다. 경제 위기와 정치적 불만이 겹치자 파리 시민들은 다시 봉기했고, 결국 루이필리프 체제도 무너진다. 이로써 프랑스는 제2공화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1790년대의 공포정치, 나폴레옹 제국, 왕정복고, 1830년 7월 혁명, 1832년 6월 봉기,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긴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의 출발점이었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지 한 왕비의 비극과 프랑스 대혁명을 그린 뮤지컬이 아니라, 그 뒤 수십 년 동안 프랑스를 끊임없이 뒤흔든 혁명의 시작점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2. 엘리자벳 : 유럽의 강자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혼기


2.1 엘리자벳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뮤지컬 속 엘리자베트는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이다. 그래서 엄격한 합스부르크 궁정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는 궁정의 규율과 충돌한다.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하게 된 과정도 뮤지컬 내용처럼 상당히 우연한 일이었다. 원래 황제의 신부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은 엘리자베트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 헬레네였는데 황제는 첫 만남에서 엘리자베트에게 반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을 선택한다. 결혼 이후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궁정 문화에 거의 적응하지 못했는데 베르사유보다도 더 엄격하다고 평가받던 이 궁정에서는 모든 생활이 의례와 규칙으로 통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가 있었다. 실제 역사도 극 중에서도 그녀와 끊임없이 대립하는 인물이 황제의 어머니 조피 대공비다. 시어머니 조피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위와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그녀에게 황후란 개인이 아니라 왕조와 국가의 상징이어야 했다. 반면 엘리자베트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란 인물로 엘리자베트는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 공주였다. 그녀는 엄격한 오스트리아의 궁정 교육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승마와 여행을 좋아했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조피는 엘리자베트를 정치적으로 미숙한 젊은 황후라고 판단했고 궁정 운영을 직접 통제하려 했다. 이 갈등은 단순한 성격 차이를 넘어 자녀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엘리자베트가 첫 딸 조피 (시어머니랑 이름이 똑같다)를 낳자 시어머니 조피는 아이의 양육권을 할머니인 자신이 가져가 엘리자베트는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거나 자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황실 후계자를 올바르게 교육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상처가 되었고 이후 그녀는 궁정 생활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심지어 첫째 딸 조피는 2살이 되던 해에 요절해 버렸고 엄마인 엘리자베트는 불행에 빠졌다. 엘리자베트는 비엔나를 떠나 유럽 각지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헝가리, 그리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를 떠돌며 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녀가 집착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미모였다. 엘리자베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유명해서 그녀는 극단적인 식이요법을 했고 하루 몇 시간씩 운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이동이었다. 그녀는 황후였지만 실제로는 유럽을 떠도는 여행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엘리자베트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거의 유일한 정치 문제는 헝가리 문제였다. 1848년 유럽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의 헝가리에서 강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 정부와의 갈등이 계속되어 심각한 위기에 처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다민족을 독일인이 지배하는 국가 구조라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민족 통일에서 배제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약소국으로 남을 위기해 처했었다. 제국을 유지하고 오스트리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헝가리 귀족들과의 타협이 필요했다. 엘리자베트는 헝가리를 매우 좋아했고 헝가리 귀족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러한 관계는 결국 중요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진다. 1867년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타협하여 새로운 국가 구조를 만들게 되는데 유럽사에서 유명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다. 이 타협은 제국을 완전히 분리하는 대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두 개의 왕국으로 공존하면서 황제는 한 명으로 모시는 이중제국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국가는 각각의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군대와 외교 정책은 공동으로 운영하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구조였다. 이 타협 덕분에 엘리자베트는 헝가리에서 매우 인기 있는 황후가 되고 헝가리 사람들에게 그녀를 자신들의 편에 선 황후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 타협이 제국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었는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함께 지배하던 체코,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자치권과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점점 더 복잡한 민족 갈등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결국 20세기 초 유럽 정치의 가장 큰 폭발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개인의 삶 역시 이 시기에 점점 더 어두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1889년 아들 루돌프의 자살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녀는 더욱 궁정과 현실의 생활에서 멀어져 검은 옷만 입고 지내며 거의 평생 상복과 같은 차림을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비엔나 궁정에 머무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고 그녀는 다시 유럽 각지를 떠도는 여행을 계속했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를 여행하며 조용히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황후였지만 실제로는 궁정을 떠난 방랑자에 가까운 삶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189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엘리자베트는 뮤지컬의 내용처럼 루케니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2.2 프란츠 요제프

엘리자베트의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는 뮤지컬에서 매우 비극적인 인물로 등장하는데 실제로도 개인사가 매우 불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황제로서의 책임 때문에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 프란츠 요제프는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군주였다. 그는 1848년 혁명 속에서 황제가 되었고, 1차 대전 발발 후인 1916년까지 거의 70년에 가까운 황제 임기를 보냈다. 그의 성격은 매우 특징적이었는데 프란츠 요제프는 매우 성실하고 규율을 중시했으며 군인 같은 생활을 했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통치한 시대였는데 19세기 유럽은 민족주의와 산업화의 시대였다.

다민족 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제국은 계속해서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탈리아 통일 전쟁 패배, 프로이센 (베를린 중심의 독일민족 국가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와 누가 중심이 되어 독일민족의 국가로 통일을 이루냐로 대립) 과의 전쟁 패배로 독일 제국의 통일에서 혼자 빠진다. 이런 민족 갈등과 연이은 패배는 결국 제국을 약화시켰다. 프란츠 요제프의 가장 큰 고민은 당연히 제국의 구조 자체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었는데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세르비아인 등 수많은 민족이 하나의 왕조 아래에 모여 있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민족 구성 때문에 독일의 통일에 함께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이 구조는 점점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1848년 2, 3월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연쇄적으로 혁명이 일어나는데 이때 제국의 취약성을 보여 주었다. 헝가리는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고, 제국은 러시아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겨우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 독립 문제는 끝나지 않았고 프란츠 요제프는 결국 헝가리 귀족들과 타협을 선택했다. 1867년 체결된 이 합의는 국가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탄생한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이 타협은 일시적으로 제국을 안정시켰으나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문제를 남겼는데, 헝가리만 특별한 지위를 얻자 다른 민족들도 같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칸 지역에서는 민족주의가 더욱 격렬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세르비아와 남슬라브 민족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다. 이 지역은 동시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긴장은 엘리자벳의 배경 한참 뒤인 1914년 사라예보에서 폭발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아들 루돌프가 먼저 죽었고, 직계 아들이 없었기에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위 계승자가 되었었는데 이 황위 계승자였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에 의해 암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이 아니어서 유럽 전체가 얽혀 있던 동맹 체제가 연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유럽은 곧 제1차 세계대전에 들어가게 된다.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뒤인 1916년, 프란츠 요제프는 긴 통치의 끝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평생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군주였는데 그가 떠난 뒤 제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해체된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여러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했고 수백 년 동안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었고 한때 유럽의 핵심 강대국이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란츠 요제프가 평생 지키려 했던 제국은 그가 죽은 지 단 두 해 만에 무너진 것이다. 뮤지컬의 내용처럼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첫째 딸은 요절했고 아들은 자살했고 아내는 암살당했다. 역사적 평가를 배제하고 개인사만 고려하면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자식들도 아내도 비극적으로 잃어버리고 매우 불행한 삶을 오래 살다가 갔다.


2.3 루돌프 황태자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루돌프 황태자는 권위적인 제국과 갈등하는 젊은 왕자로 등장한다. 그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며, 군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제국 체제에 점점 절망해 간다. 작품 속에서 루돌프는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의 권위적인 정치와 충돌하고,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국 속에서 고립된 인물로 묘사된다. 이 설정은 완전히 허구가 아니라서 실제로도 역사 속 루돌프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왕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언론 자유와 개혁적인 정책에 관심이 있었고 헝가리 정치 세력과도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매우 불안정했는데 황태자로서의 책임과 궁정 정치의 압박 속에서 그는 점점 우울한 삶을 살았고 정치적으로도 자신의 생각을 실제 정책으로 실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루돌프 황태자는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했고 부부생활에서 아내와 성격차이도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루돌프는 마리 베체라라는 인물과 불륜을 저지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극대노하고 아들 루돌프와 관계는 파탄 난다. 이러한 비극들은 결국 1889년 마이어링 사건으로 이어진다. 루돌프는 비엔나 근교의 마이어링 사냥 별장에서 불륜 상대였던 마리 베체라와 동반자살한 채 발견된다. 아들의 자살로 부모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모두 큰 충격에 빠진다. 황태자의 죽음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제국의 후계 구조도 크게 흔들리게 된다. 결국 왕위 계승자는 프란츠 요제프의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가 훗날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유럽 역사는 또 한 번 거대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2.4 루이지 루케니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이야기의 화자는 엘리자베트를 살해한 남자 루이지 루케니다. 작품 속에서 그는 냉소적인 해설자이자 시대를 비웃는 인물처럼 등장하여 황실의 권위와 사회 질서를 조롱하며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시선을 제공한다. 루케니도 실제 역사에도 존재했던 인물로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한 노동자였으며 당시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던 아나키즘 (무정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세기말 유럽에서는 왕족과 정치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아나키스트 테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루케니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왕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그는 뮤지컬의 결말처럼 여행 중이던 엘리자베트를 발견하고 줄칼로 황후를 찔러서 살해했다.


2.5 조피 대공비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조피 대공비는 황제의 엄마로 작품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과 권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작품 속에서 조피는 젊은 황후 엘리자베트를 끊임없이 통제하려 했고, 황후는 개인이 아니라 왕조와 국가의 상징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특히 두 사람의 갈등은 자녀 문제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엘리자베트의 아이들을 사실상 자신이 키우려 했고, 이로 인해 황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뮤지컬에서 이러한 모습은 냉혹한 시어머니의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 속 조피는 단순한 궁정 악역이라기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왕가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녀는 며느리 엘리자베트처럼 바이에른 왕가 출신 공주였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특히 1848년 혁명으로 제국이 흔들리던 시기에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래는 조피 대공비의 남편이 황제 계승자였으나 남편을 꽉 잡고 살던 조피는 무능한 남편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고 남편을 조종해 아들 프란츠 요제프에게 황제 계승을 양보시키는 대단히 정치적인 엄마였다. 아빠 대신 황제에 오른 초기의 프란츠 요제프는 뮤지컬 내용 그대로 마마보이 그 자체였고 나라의 중대 사항을 엄마와 함께 결정했다. 엄마 조피가 1872년 사망하고 나서야 아들 황제는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즉 프란츠 요제프의 즉위와 초기 통치는 상당 부분 조피의 정치적 판단과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뮤지컬 속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나오는 엘리자베트와의 갈등 역시 단순한 성격 충돌이라기보다 권위주의적이고 정치적인 시어머니와 자유로운 며느리의 충돌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2.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당시 역사

엘리자벳의 배경이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한때 유럽 정치의 중심에 있던 거대한 다민족 제국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와 프란츠 요제프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이 제국이 겉보기의 위엄과 달리 내부적으로는 점점 균열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 출발점은 역시 1848년 혁명이었는데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의 물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로 번졌고, 합스부르크 제국 내부에서도 각 민족의 불만이 폭발했다. 특히 헝가리는 강한 자치와 독립을 요구했고, 제국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이를 진압했다. 오스트리아는 이후 국제정치에서도 연이어 타격을 받는다. 1853년부터 시작된 오스만과 러시아 사이의 크림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친하게 지내던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돕지도, 그렇다고 러시아 편에 확실히 서지도 않았다. 이 모호한 태도는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훗날 발칸 문제에서 오스트리아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 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이탈리아 문제에서도 계속 밀려난다. 이후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북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약화시켰고, 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독일 세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는다. 이 전쟁의 결과는 결정적이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독일을 이끄는 중심 국가가 아니었고, 프로이센 중심의 새로운 독일 통일 질서 밖으로 밀려난다. 프로이센 중심으로 독일 제국이 성립하면서, 합스부르크는 독일 민족국가가 아니라 중부유럽의 다민족 제국으로 생존 전략을 다시 짜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이었다. 이는 제국을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두 개의 동등한 정치 단위로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황제는 한 명이지만, 양쪽은 각자의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군대와 외교 등 일부만 공동 운영하는 독특한 이중제국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 체제는 헝가리 문제를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헝가리만 특별한 지위를 얻자 체코,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같은 다른 민족들도 같은 수준의 권리와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오스트리아가 위의 민족들을 지배한 사례나 스페인이 포르투갈, 네덜란드를 지배한 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처럼 일방적 침략에 의한 식민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정략결혼과 왕관, 영토 상속에 따른 지배이다. 이렇게 제국의 중심 문제가 점점 발칸 문제로 이동하던 가운데, 1877~78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 이후 산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된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발칸에서 친러 성향의 거대한 불가리아를 만들려 했고, 이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크게 자극했다. 결국 같은 해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산스테파노 조약은 수정되었고, 발칸 질서는 다시 재편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땅에 대한 행정권을 얻게 된다. 겉으로는 외교적 성과였지만, 이 권리가 추후 유럽의 대참사로 이어진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발칸은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였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에서 쇠퇴하자 빈자리를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여러 세력이 경쟁했다. 특히 세르비아는 남슬라브 민족주의의 구심점이 되기를 원했고, 이는 일부 남슬라브 민족들을 지배하는 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남슬라브 민족의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병합한다. 이 조치는 세르비아와 러시아의 거센 반발을 불렀고, 양측의 적대감은 한층 심해진다. 이후 1912년과 1913년의 발칸전쟁은 이 지역의 긴장을 더욱 끌어올렸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밀려나고, 세르비아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큰 불안을 느끼게 된다. 제국 입장에서는 외부의 세르비아가 강해질수록 내부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영토 남슬라브 민족들의 독립 열망이 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14년, 사라예보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얽힌 동맹 체제가 연쇄적으로 작동하며 유럽은 곧 제1차 세계대전에 들어간다. 엘리자벳이 보여주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비극은 단지 한 가족의 비극만이 아니라 내부에서 균열되고 있던 다민족 제국 전체의 비극이었고, 그 균열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참사를 만드는 시작점이었다.


결론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는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나라의 왕비였지만, 두 사람의 삶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거대한 제국의 중심에 있었지만 결국 그 제국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아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상징이었지만 그녀의 죽음과 함께 구체제는 무너졌고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은 혁명의 시대로 들어갔다. 반대로 엘리자베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겉으로는 여전히 강대국이었지만 내부에서는 민족 갈등과 국제 정치의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이 울렸고, 그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결국 두 뮤지컬이 보여주는 이야기는 단지 한 왕비의 비극적인 삶이 아니라, 유럽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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