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

겉으로 봐선 몰라요.

by 노사임당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목이 까칠하다. 어제 노래방도 안 갔는데 갔다 온 것 같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가만 생각해 보니 누군가 떠올랐다.



내가 사는 곳은 평지도 많고 강을 끼고 도시가 발전한 탓에 농사 인구가 경상권 치고 많은 곳 같다. <우리 슈퍼>는 그런 도시에서도 농사짓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볼 수 있는 '읍'에 있다.

오시는 분들 5할 이상은 밭일, 하우스 일, 논일하시다 오는 일복 차림의 농부. 농령기(농사짓기 적당한 나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신규 진입은 없고 하시던 분들만 하는 일이 된 농사라 연령대가 높다. 그분들이 일을 하다 식사 준비하러 콩기름이고 배추를 사러 오시는데 오늘은 유난히 할머니 손님이 많았다. 여기저기 서로 아는 얼굴이라 인사말이 난무한다. "어 왔나?" "뭐 사러 오셨어요?" "많이 샀나?" "요즘 어디 계세요?" 등등

연세가 어느 정도 되신 분을 보면 내 눈에는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구분이 안 간다. 아마 누구라도 그러하리라. 그러니 그냥 <할머니> 한 카테고리에 넣어진다. 그렇지만 들어오시는 손님들은 "아이고, 언제 오셨어요?" 하고 "어 장 보러 왔나?" 한다. 나이도 한참 차이 나는 거 같은 말투다. 그런데 존댓말 쓰는 쪽이 더 나이 들어 보이고 막 그렇다. 외모로만 구분을 지어야 하는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머리가 까만 할머니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허리가 굽어 걸음 보조기를 밀고 온 할머니가 허리 꼿꼿한 할머니에게 요즘 어찌 지내시냐 안부를 묻는 그 풍경. 개그맨들이 상황을 설정해 놓고 한 판 벌이는 무대 같다. 내 앞에서만 펼쳐지는, 한 사람을 위한 무대. 흥미진진하여 한 장면도 놓치기 아까운 그 무대.


내 눈을 사로잡는 그 무대에서 오늘 유난히 대사가 귀에 꽂히는 팀이 있었다.


큰 키에 허리가 아주 약간 굽었고 머리카락도 많이 듬성한 어느 할머니 고객님. 슈퍼를 한 바퀴 돈 뒤 과일을 보러 계산대 근처로 왔을 때였다. 자그마한 키에 머리카락은 칼같이 염색을 하고 꼿꼿한 허리를 아끼지 않고 편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그러자 조금 전 하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염색을 기다리는 손님이 반기며 말을 건다.

"뭐 사러 오셨어요?

"..."

언니랑 싸운 동생처럼 쌩하니 물건 속으로 사라진다.

약간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더니 과일을 마저 고르는 할머니 손님.

조금 후 쌩하니 사라졌던 할머니가 두부랑 설탕 작은 봉지를 들고 계산대로 오셨다.

"뭐 사러 오셨어요? 다 고르셨어요?"

"어"

"저녁 찬거립니꺼?"

"머?"

"저녁에 드실 거 사셨냐구예"

"머라카노?"

"저녁에 드실 거 사신 거예요?"

"어"

"이쁘게 머리도 염색하시고 장도 보러 오시고 건강하시니 보기 좋아요"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무슨소리하노" 나이 많은 나를 놀리느냐는 어감이 실린 말투다. 연세는 많으셔도 감도 좋고 이해력도 좋으셨다.


겉으로 보기엔 두 분의 나이는 누가 봐도 머리가 흰 할머니가 언니 같았는데. 다행히(?) 나이를 먼저 드신 할머니가 귀도 먼저 먹어가니 겉모습이 다는 아닌듯 했다. 농사가 고되어 몸이 먼저 굽었어도 혹사시키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건강했을 거 같다. 머리 흰 할머니 손님은. 이렇게 귀도 멀쩡하니 말이다.


하마터면 나이 많으신 할머니의 정정하신 외모에 무척이나 억울할 뻔했는데 속상함은 면했다. 머리카락은 할 올도 빼지 말고 검게 염색을 하고 허리가 아픈 건 침도 맞고 병원도 부지런히 다니면 나빠지는 건 막겠지. 놀리기 아깝다고 밭에 가시는거 그만두고. 그리고 귀가 잘 들리니 답답하지 않다. 누가 나이 많아 보인다고 흉보면 대번에 <반사> 해 줄 수 도 있는 [소머즈 귀]가 아직은 젊은 할머니 것이니까 말이다. 공평하지 않은 세상사에 기분이 나쁠뻔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나이를 먹어 할머니가 되었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나이 많은 선배님은 지천에 계시다. 다행이다. 이 정도면 내 나이가 어디가도 '탑 클라스겠지' 해도 더 많은 선배는 꼭 계시니. 할머니의 나이는, 할머니의 귀처럼 아직 한창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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