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한 번째 겨울 1

최순집의 이야기

by 그런 날

최순집은 나의 외할머니, 즉 내 엄마 지옥선의 어머니다.

내가 엄마를 기록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이야기의 시작점에 최순집이 있었다.


지금은 이미 최순집은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물을 수도 없고 더 알 수도 없다.


나는 40년전 고등학생 시절 3년을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그때 들었던 이야기를 더듬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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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집은 1908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사실 순집이란 이름은 애초에는 없었다.

양반가라고는 하나 이미 몰락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을 때 누구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언나'라고 불렸을 뿐이다. 순집이라는 강릉 최씨 항렬자를 넣은 이름은 나중에 주민등록법이 생겼을 때 그녀의 남편이 지어주었다.


순집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지 몇달 후 정미의병에 나가 목숨을 잃었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식을 여럿 낳았지만 어려서 다 잃고 두 오누이만 키우고 있었는데 홀로 애쓰며 살아도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이런 형편이라 어린 순집은 일곱여덟살부터 이웃의 아기보기가 되어 겨우 풀칠을 하며 컸다. 집 근처에 있던 소학교를 멀거니 쳐다보며 배고픔같은 통증을 느꼈지만 그 느낌이 뭔지 헤아릴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순집이 열세살이 되던 해 큰 홍수가 있었다. 큰 비는 산사태로 이어졌고 산자락 밑의 오두막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순집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순집과 세 살 터울의 오빠는 고아가 되어 세상에 남겨졌다.


순집이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중신이 들어왔다.

상대는 도암면 수하리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는 서른 살의 노총각이었다.

밥은 먹고 살 만하다는 것이 신랑감의 조건이었다.

그렇게 순집은 낯선 곳 낯선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은 쳐다보기만 해도 무섭고 어려웠다.

사실 제대로 쳐다본 적도 거의 없었다.

어린 새댁은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 고되고 괴로웠다.

그렇게 살면서 아홉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셋은 두 살 이전에 이런저런 병으로 죽고 2남4녀를 길렀다.


나의 엄마 옥선은 여섯 중 넷째 자식이다. 위로는 오빠 둘과 언니 하나, 아래로는 여동생 둘이 있다.


농사꾼의 자식이란 세상에 나올때부터 농사꾼이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자기 몫의 일이 주어진다.

부지런함과 힘쓸 줄 아는 능력이 그들이 익히고 배워야하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순집의 자식들도 그렇게 컸다.


순집은 52세에 과부가 되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였다.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누구를 나무랄 줄도 모르는 순집은 더 나이를 먹으면서도 그 성품 그대로 늙어갔다.

단 하루도 밤 아닌 시간에 누워본 적이 없고 늦잠을 자본 적이 없으며 가만히 앉아 쉬는 법도 몰랐다.

생선의 살을 온전히 먹어본 적없이 뼈와 대가리만 섭취했으며 제 손으로 옷을 산 적도 없고 늙어서까지 삼사십 리 길은 걸어서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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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대개 강릉으로 했는데 집을 떠나 살아야하므로 자취나 하숙을 했다.

그런데 고명딸인데다 다른집 딸들에 비해 어리고 미숙한 딸을 혼자 내보는게 불안했던 나의 부모님은 외할머니를 불러서 나와 함께 살게 하였다.


사실 열여섯살의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사는 게 좋지 않았다.

음식 솜씨가 없었던 외할머니의 밥을 먹는 게 날이 가도 익숙해지지 않았고, 외할머니의 낮은 위생관념이 예민하고 까칠했던 나에겐 꽤나 고통스러웠다.

또한 극강의 부지런함을 장착한 외할머니의 눈에 나태하고 느릿한 내가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그렇게 우린 3년을 함께 살았다.


외할머니가 얼마나 억척스러운 사람인가는 우리가 헤어지는 순간에 다시 한번 드러났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 소식을 전했을 때 외할머니는 쌈지에서 그동안 모아둔 거금을 꺼내주었다.

대학 입학금이었다.

나를 보살피면서 이런저런 부업을 쉬지않고 하여서 마련한 돈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으나 할머니 스스로의 마음이 그것을 만들었다.

참으로 먹먹하고 한편 딱한 마음이 들었다.


외할머니 최순집은 1997년 90세의 나이로 옥계의 작은 아들 집에서 눈을 감았다.

아들 둘은 진작에 먼저 보낸 후였다.

그때 나는 부음을 듣고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첫 임신을 유산한 후 두번째 임신에서 유산을 조심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터였다.

남편을 장례식에 보내고 그날밤 외할머니와의 기억을 잠시 반추했다.


그리고 오늘

뜻밖에도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기록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지도 이제는 40년이 넘었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놀랍게도 외할머니의 말소리와 억양과 행동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서 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의 존재가 모계의 혈관을 타고 외할머니를 거쳐 엄마를 지나 나에게 흘러왔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