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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덕 Jan 05. 2024

미술관에서

인생 첫 번호 따기

언제나 그렇듯 오후 5시 10분의 기차표를 예매하고 점심 전에 집에서 나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교보문고를 들렀다 시청역에 위치한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을 향했다.


건축학도에게 서울에서 서울도시건축전시관보다 시간을 때우기 좋은 장소는 없다. 관람비 무료에 주기적으로 바뀌는 흥미로운 건축전들.


여기서 나는 당분간 잊지 못할 그녀를 만났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번호를 따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남자가 돼서 한심하게.


물론 술에 대판 취해 클럽 같은 곳에 기억도 못할 사람들에게 핸드폰을 들이민 적은 있다. 그 외에 맨정신에 자의적으로 번호를 따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간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 겁이 많이 났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남자친구가 있으면 어쩌지, 무례한 건 아닌가. 맞다, 나는 겁쟁이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건축이라는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만 오는 장소인 데다가 평일 오후 한적한 시간대에 사람도 없었다. 그 큰 전시장에 혼자온 사람이라고는 나와 그녀밖에 없었다.


취미의 힘은 강하다. 하나의 큰 취미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같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의 폭이 넓다는 것, 더구나 해외에서 유학하는 나에게 한국에서 건축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귀했다. 그 인연이 탐났다. 더구나 그녀의 전시에 열중하는 태도와 검은 코트와 가죽구두의 차림새는 나의 심장을 두드렸다.



그 큰 공간 안에서 나는 그녀의 뒤를 멀찍이 따라다녔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내 마음속의 불씨는 점점 붉어졌다. 나 오늘은 기필코 용기를 내어 인생 처음으로 번호를 따고 마리라.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내게 눈빛을 주기도 몇 번, 전시 관람이 끝나고 전시관 출구의 계단을 올라갈 때 역시 나는 멀찍이 뒤에서 따라 올라갔다. 계단의 끝의 다다랐을 때 그녀는 뒤돌아 가만히 서 나는 바라보았다.


나는 황급히 눈을 피하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괜히 급히 답장할 카톡이 있는 척. 핸드폰을 바라보며 그녀를 지나쳐가는 동안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뒤통수에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거리를 좀 벌린 뒤 용기 내어 뒤돌아 봤을 때 그녀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지금 가서 물어봐야 하나, 그냥 도망칠까 고민하는 와중에 야속한 나의 다리는 걸음을 멈추지 못했고, 그렇게 우리의 거리는 멀어졌다.


이대로는 안돼. 다시 돌아가 번호를 물어보기로 결심하고 다가가기 시작할 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 안돼, 이러면 너무 따라가는 거 같잖아. 나는 다른 루트를 선택하여 그 길의 끝에서 그녀와 맞닥뜨려 우연을 가장한 채 번호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뿔싸, 나도 처음 가보는 이 길이 막다를 곳으로 향할지 어찌 알았으랴. 황급히 되돌아가 그녀를 찾아봤지만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주의를 배회하며 나의 시야에 그녀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인연이라면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겠지라는 황당한 자기 합리화와 함께 나는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쓰다.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아쉬움을 기록하며 이 글을 써본다. 다음엔 용기 내어 다가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오늘의 주제곡 콜드 <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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