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by 은빛바다

2002년 알지? 한일 월드컵. 대단했지. 대~ 한~ 민~ 국! 짝짝짝! 짝짝! 붉은 악마. 4강 신화. 히딩크 어퍼컷! 꿈은 이루어진다.


나라가 붉은색이었어. 해외에서 이렇게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고 감탄했잖아. 9시 뉴스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그랬어. 대한민국이 이렇게 하나가 된 적은 단군 이래 처음이라고. 단지 축구공으로 말이야.


맞는 말이었지.


그 시절에 나는 용역 청원경찰이었어. 줄임말로는 청경이라고 하지.


이게 뭐냐면, 국가기관이나 은행에서 제복 입고 가스총 찬 보안요원 있잖아. 바로 그거야. 아파트에서 근무 서는 경비 아저씨랑 비슷한 거지.


명칭은 경찰이지만, 경찰서에서 교육받은 건 없었지. 용역회사에서 면접자가 군필이고 팔다리 멀쩡하면 뽑아. 곧장 근무지로 파견하면서 제복과 가스총만 지급하면 그만이야.


월급은 통장으로 보냈고. 용역회사 임원이 자기 직원이라고 근무지로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어.


근무 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어.


회사가 친목 단체는 아니잖아. 눈빛만 잘못 흘려도 뒷말로 매장시키는 곳이야. 허접한 용역 청경이 처음 만나는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


매일매일 얼마나 자존심이 무너지는 대우를 받았을지 상상이 가?


전에는 라디오 만드는 하청업체에서 일했는데 맨날 야근이었어. 내가 공고 전기과를 나왔거든. 책상에 앉아 PCP 보드가 오면 용접해서 옮기고 다시 PCP 보드가 오면 용접해서 옮기는 단순 노동자였어. 엄청 지겨웠어.

하루 종일 납 타는 냄새를 맡다가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출입문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러웠지.


군대 다녀온 다음에 다시 공장으로 가기가 싫은 거야. 출근을 안 하고 노니까 그것도 미치겠더라. 가족 눈치를 감당하기 힘들더라구.


직업소개소를 찾아갔지. 거기서 병장 제대했으니 은행 청원경찰을 해보래. 퇴근 시간이 정확해서 저녁에는 학원 같은 곳에 다닐 수 있대. 힘든 일은 없고 건물 경비만 잘 서면 되니까.


용역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임영훈 과장이랑 인천에 한강은행 건물로 갔어. 지점에서 근무하는 줄 알았는데 거기가 인천을 관할하는 본부였던 거야. 은행이 아니라 건물 경비였지.


1층에 한강은행 중앙지점이 있고. 총무과에서도 면접을 봤는데 당시 인사과장이 오래 근무하도록 당부하더라. 이직률이 많았던 거지.


하긴 젊은 나이에 누가 허접한 경비를 하려고 하겠어?


근무지에 배정받은 시기가 2002년 월드컵 기간이었어.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다니더라. 그들도 대~ 한~ 민~ 국! 하면서 술집이나 거리에서 함께 박수를 쳤을 거야. 정규직 용역직 구분 없이. 안 그래?


공장에서 비슷한 처지의 공돌이끼리 어울리던 시절에는 몰랐는데, 한강은행으로 들어오니 위축이 되는 거야. 거기는 연봉 1억 가까이 되는 부장도 있었으니까.


전부 반듯한 정장에 승용차를 몰고 출퇴근을 하는데 허접한 점퍼를 입고 전철역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가 얼마나 창피했겠어.


용역 회사는 항상 최저 임금에 맞춰서 줘. 그래야 자기 회사에 더 이익이 돌아갈 거 아냐. 그만 둔다고 하면 피복비 제외하고 이제까지 일한 월급만 주면 끝이야. 용역 회사로 오는 나 같은 놈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꿀리기 싫으니 경찰 시험을 준비한다고 거짓말 했지. 지금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항상 경찰시험 교재를 들고 다녔어. 주차관리 하면서 책을 읽어도 된다고 하기에 보여주기 식으로 갖고 다닌 거지.


사실 시험이라도 쳐볼까 하고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읽어봤는데 내 수준에는 맞지 않더라고.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


한강은행 인천본부는 1층 로비에서 청경 2명이 근무했어. 밥 먹으려면 서로 교대도 해줘야 하잖아.


나랑 같이 일한 청경이 아직도 안 잊히는데 이름이 김우준이야. 우주에서 ㄴ 만 붙여서 ‘우준’. 이렇게 외우니까 평생 기억을 하겠더라구.


독특한 형이기는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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