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체르마트 & 고르너그라트
혼자 여행을 하고 나서 돌아가는 숙소는 아늑해야 한다. 사실 철저히 타이트한 예산 안에서 선택한 가성비 숙소가 집과 같은 아늑함을 줄 순 없지만, 최소한 스스로의 기준에 부합하는 숙소를 선택해야 한다.
나의 경우 안전, 역세권, 청결도를 가장 중점적으로 보고 숙소를 결정한다. 작은 동양인 여자로서 싸다고 안전하지 않은 숙소를 고를 만큼 대담하진 않고, 시간이 소중한 여행인 만큼 이동거리의 효율성을 위해 역이나 정류장 근처의 숙소에 가산점을 준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고집인데, 최대한 벌레 없는 깨끗한 숙소를 고른다. 바선생, 거미교수, 개미학생들... 너무 무섭다. 사실 웃기다. 20개 나라 40개 도시를 넘게 혼자 여행한 여자가 고작 벌레를 무서워한다니. 부끄러워 마땅하다. 하지만 어떡하나, 사람보다 다리 많은 벌레가 더 무서운 걸?
그런 면에서 스위스 체르마트의 호스텔이 가장 머물기 쉽지 않은 숙소였다. 그만큼 다른 곳들에 비해 훨씬 저렴했으니, 내 손으로 저지른 만행이었다. 우선 수많은 나무 계단이 26인치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는 나를 반겼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쓴맛은 단맛과 함께했다. 기차역에서 가까운 호스텔 덕분에 체르마트 시내 분위기도 느끼고, 유럽에서 온 또래 여행객들도 정말 많이 만났다.
특히 호스텔에 들아가자마자 마주친 동갑 스위스 남자애가 기억에 남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허리춤에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었기 때문.
체르마트는 산악열차를 타고 고르너그라트 산에 올라가기 위해 방문했던 만큼, 짐을 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KTX를 타본 사람들은 한국 지방의 자연 풍경도 상당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스위스 산악열차를 타고 보는 뷰는 상상을 초월한다. '1시간 연속 힐링 자연 영상'과 같은 제목의 유튜브 영상에서 등장할만한 거짓말 같은 자연 풍경이 펼쳐진다.
없던 여유도 샘솟고, 없던 사랑도 몽글몽글 꽃피게 만드는 광경. 그 어떤 썸남도 없었던 나는 그렇게 스위스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한여름인 7월에 갔는대도 고르너그라트 정상의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고르너그라트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토*론 초콜릿에 박힌 마터호른이 보이는 뷰 덕분이다. 사부작 부작 챙겨간 초콜릿을 꺼내서 눈앞 마터호른과 비교해 본다. 큭, 웃음이 나온다. 그러네. 똑같이 생겼네.
이게 왜 그리 해보고 싶었을까. 여행은 이런 작은 오기에서 시작되나 보다. 유럽 여행은 특히 첫 혼자서 떠난 해외여행이었기에 모든 걸 '정석'으로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이상한 기준을 가지고 시작됐다.
그래도 다행히 빠르게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행에 정해진 기준이 어딨어. 인생도 한 치 앞을 모르는데.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고르너그라트는 체르마트에서 산악열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그런 만큼 역에 기념품샵도 있고 전망대도 있다. 같은 관광지인데도 융프라우에는 한국인들이 정말 많았는데, 고르너그라트에는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6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을 볼 수 없는 여행지를 좋아하는 건지, 한국인들이 그래도 찾는 여행지를 좋아하는지 스스로를 끝까지 파악 못했다. 어쩌면 한국에서 사람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까다로운 나와 같나 보다.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싫고, 늘 함께 있으면 자유가 부족해서 싫고. Peaky Girl.
고르너그라트에 올라간다면, 거기서 바로 열차를 타고 내려오지 말고 한 정거장 정도 걸어서 내려오는 걸 추천한다. 고르너그라트 바로 전 역은 로텐보덴인데, 하산길이라 힘들지도 않고 내려가는 내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너무나 작고 자연은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어떤 광고보다 설득력 있게 뇌리에 박아준다.
정말 하산길에 나밖에 없었다. 마주친 생명체는 주인 모를 양 떼들 정도.
당연히 순간순간 '여기서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와 같이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이만큼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잠깐이나마 스위스 산에 마음껏 뛰어노는 동물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외로워서 불안했고, 고독해서 평온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