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과 동시에 출근

WEEK1 [6/16-22]

by 시옹

6/16 월, 입국한 지 8시간 만에 출근

사실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에는 여행조차 와볼 생각을 안 했다. 취업이 아니었으면 평생 가보지 않았을 나라다.

나의 여행지 취향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나라였고, 그래서 말레이시아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쿠알라룸푸르가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것도 취업준비를 하면서 알게 되었고, 많이 들어본 코타키나발루가 말레이시아인 것도 그때 알았다. (심지어 코타키나발루도 가볼 의향이 전혀 없었음)

그래서 회사에 최종합격하고 나서야 말레이시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시작했다. 직전에 근무했었던 필리핀 세부와는 비교하면 서운할 만큼 도시이며, 동남아 국가 중 싱가포르 다음으로 GDP가 높은 나라, 말레이시아.


나는 입말 하기 전 제주에 살았었는데, 제주 라이프가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최대한 출국을 미뤘다. 그랬다 보니 어제 제주-김포-인천-쿠알라룸푸르 일정으로 입말을 하고, 오늘 첫 출근을 하는 지옥 스케줄이 펼쳐졌다. 혀가 굳을 만큼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모두 나의 업보였다.


그렇게 아침 8시 반에 첫 출근. 회사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올리고, 내 자리에 앉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 뵙겠습니다"를 20번은 족히 한 것 같다.

웃프게도 나에겐 이곳이 무려 8번째 첫 출근이다. (파란만장한 진로 스토리는 나중에 다뤄봄) 처음이 아니라서 그만큼 긴장되진 않았지만 힘들고 어색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럴 수가, 일복이 터지고야 말았다. 회사가 바쁜 시기에 투입이 된 것 같다. 출근 첫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시간 야근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별거 아닌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첫날인지라 모든 게 새롭고, 낯설고, 어렵고,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완전히 처음 와보는 나라에서 입국한 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는데 출근을 했으니, 머리가 복잡할만하다.

하루 종일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업무 네트워크와 체계를 조금이라도 익혀보려 하다 보니 벌써 저녁 7시. 드디어 혼자가 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임시숙소 옆 베트남 음식점에서 저녁을 때웠다.

아직 말레이시아 번호도, 워킹퍼밋도, 통장도, 카드도 없다. 하루 만에 갑자기 내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금까지의 역마살 인생 덕분에 이런 극한의 상황이 조금은 덜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데 이걸 어쩌나. 잠이 오지 않는다. 평범한 직장인처럼 원래 꽤나 심한 불면증을 앓고 살았는데, 제주에서 두 달간 백수로 살면서 좀 괜찮아지나 했더니 또다시 잠자는 법을 까먹었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6/17(화), 계속되는 야근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회사 행사장에 따라갔다. 오늘도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인지가 안 되는 컨디션으로 손님들을 상대하고, 내일을 준비하느라 2시간 야근을 했다.

사실 과거에는 야근이라는 단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회사에 다녔어서 야근이 너무나 낯설다.

그리고 계속 서있다 보니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서 쥐가 나기 시작했다. 서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는 하루.

8시 정도에 침대에 쓰러져 바로 실신해 버렸다.


6/18(수), 서서 일하는 사람들 존경합니다

오늘 설인아 닮았다는 얘기 들었어요 축하해주세요^^

오늘도 이어지는 행사.

어떤 프로젝트의 중간과정에서 입사를 하게 되면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이 된다. 어떠한 결정이나 선택을 하기엔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이번이 N번째 입사인 나는 그저 태연한 척하면서 최대한 뇌를 쓰지 않고 몸을 쓰는 일을 도왔다.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프로젝트를 망치는 일이니.

그렇게 오늘은 극적으로 30분 야근으로 끝이 났다.

임시숙소 호텔로 돌아오니 다시 밖으로 나갈 힘조차 없다. 그랩으로 맥도날드를 시켜 먹고 회사 때문에 미뤄왔던 현생을 살려고 했는데, 뇌가 더 이상 작동하질 않는다. 원래 무슨 일을 하려 했더라... 할게 뭐가 있었더라...

이번 주가 지나면 좀 나아질까 싶다. 다시 원래 궤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회사에 적응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6/19(목), 첫 칼퇴근과 운동 찍먹

처음으로 칼퇴근을 했다. 그러나 회사에 다녀오면 에너지가 고갈돼서 숙소로 가는 것 말고는 뭔가를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운동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 호텔 헬스장을 들렸다. 머신이라고 할 건 거의 없었고, 덤벨은 많더라. 그조차 팔운동을 위한 1-2kg짜리 덤벨은 없었다. 이렇게 환경이 바뀌면 생활 루틴도 망가진다는 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주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집-일-집만 반복했다.

10월에 큰 행사가 끝나면 회사 상황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그건 또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같은 호텔에 머무는 직장 동료분과 저녁에 잠깐 얘기를 나눴다. 이 분도 얘기할 상대가 필요했는지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해외로 이직을 하면 환경과 주변인들이 동시에 바뀐다. 그만큼 매우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 안에서 만나는 인연들(특히 한국인들)에 대해 아무래도 좀 더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해외생활을 미루어봐서는 이런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 한국에서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행동은 되도록 안 하는 것이 좋고, 사람들에게 너무 빨리 나 자신을 오픈해도 나중에 독으로 돌아올 수 있다.


6/20(금), 뒤바뀐 환경 속에서 루틴 되찾기

퇴근 후 헬스장을 구경 갔다. Anytime이라는 프랜차이즈인데, 여기는 이상하게도 헬스장에 입장하기 위한 카드를 처음에 구입을 해야 한다. (돈 더 받아먹기 수단인 듯) 입장카드 225링깃은 디폴트로 내야 하고, 6개월에 월 209링깃, 12개월에 월 199링깃이라고. 한화로 치면 카드값 73,000원에 월 68,000원 정도가 나가는 셈이다. 한국에서도 프랜차이즈 헬스장을 6개월 끊으면 총 30-40만 원 대에 다닐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쿠알라룸푸르가 상당히 비싼 편이다. 헬스장에 가보니 수건, 운동복, 정수기 등의 한국인 기준 기본적인 물품도 없었고, 기구도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지금 호텔에 있는 무늬만 헬스장과는 달리 운동하기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늘은 파빌리온 엠버시(Pavilion Embassy)라는 레지던스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해봤는데, 여기도 기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세바스찬 스탠에게 빠졌다. 사실 빠진 지 좀 됐다. 오직 그를 보기 위해 넷플릭스에서 영화 <커버넌트> (The Covenant, 2006)를 봤는데, 감독이 제작 당시 10대 사춘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유치해서 끝까지 보기도 힘들었다.


6/21(토), 집 구하기 삼만리

다시 직장인이 된 건 맞나 보다. 주말에도 일찍 눈이 떠졌다.

오크우드 호텔(Oakwood Hotel) 수영장에서 좀 수영을 하다가 조식을 먹었다. 오크우드 호텔은 오래된 4성급 호텔인데, 무난하긴 하지만 관광객들이 올만한 호텔은 아닌 것 같다. 수영장도 조식도 상대적으로 허접하다.

오늘은 집을 보러 다녔다. AtriumDamai88이라는 건물을 구경했는데, 우선 Damai88은 아웃. 중개업자에 따르면 건물의 방 중 80%를 한 주인이 소유하고 있고, 그 주인이 좀 소통이 안되고 까다롭다고. Atrium의 경우 옆에 유명한 국제학교가 있고 주변에 대사관이 많아서 자녀들의 조기유학을 위해 온 가족들이나 대사관 직원들이 많이 사는 것 같다.

수리아몰에 처음 가봤다.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유명한 몰은 수리아가 맞지만, 저렴한 쇼핑을 위해서는 에비뉴K에 가는 게 좋다. 수리아가 백화점이라면 에비뉴K는 아울렛 정도의 느낌.

우선 수리아몰 3층 Maxis에 가서 유심을 개통했다. Postpaid(보증금 150 링깃)로 통화/문자 무제한 + 데이터 100기가가 월 45링깃이었다. 한화로는 한 달에 15,000원 정도니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필리핀 세부에서는 매장에서 시간도 많이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개통 자체도 오래 걸렸는데, 여기는 마치 한국 통신사 매장처럼 빠른 서비스를 보여줬다. 거의 20분 만에 개통 완료!

회사용 샌들을 사기 위해 수리아몰 3층 Vincci와 4층 Bata를 구경하다가, 4층 Watsons에서 클렌징폼과 치약 등을 샀다. 리스테린 미니 구강스프레이도 샀는데, 이거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워서 쿠팡에서 며칠을 기다려서 샀던 앤데 여기는 쉬고 더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다이소 동남아버전 Mr.DIY에서 말레이시아 필수품 우산과 회사용 미니 거울을 샀다.

저녁은 Kenny Hills Bakers에서 피자와 연어 샐러드를 먹었다. 2인 식사해서 약 3만 원 정도 나오는 가성비 좋은 레스토랑. 분위기도 좋고,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사실 나는 직전에 거주했던 비교군이 필리핀 세부여서 그런지 일주일 동안 쿠알라룸푸르를 보면서 놀라기만 하고 있다.


6/22(일), 영화만 볼 수 있다면 어디든

여기서는 매일 샌들을 신게 되어서 페디큐어가 시급했다. 급한 대로 오크우드 호텔 근처 상가에 The Nail Room HC라는 곳에서 페디큐어를 받았다. 가격은 135링깃. 기계도 없이 손으로 각질을 제거하고 풋스크럽도 해주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페디큐어였다. 컬러 초이스도 많지 않고 파우더 네일조차 없기 때문에 절대 추천하진 않는다.

나는 어느 나라에 살아도 문화생활은 영화관만 있으면 만족하는 편이다. 세부에서도 아얄라몰에 영화관이 있어 한국영화 <검은 수녀들>부터 <캡틴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까지 잘 보고 살았었다. 말레이시아에도 GSC, TGV 등 영화관이 잘 되어있다. (GSC는 우리나라 CGV, TGV는 롯데시네마 정도라고 생각하면 됨) 나는 존윅 세계관 신봉자라서 수리아몰 3층 TGV에서 이번에 개봉한 <발레리나>를 보러 갔다. Beanie라는 2인용 커플 좌석 (55링깃)이었는데, 정말 불편했다. 나름 소파 형식인데 좌석 쿠션이 너무 푹신해서 도저히 2시간 동안 앉아있을 수 있는 자세가 안 나왔다.

저녁은 지인의 추천으로 Pavilion 쇼핑몰Suki-Ya라는 샤브샤브 뷔페에서 먹었다. 인당 2만 원 내외로 소고기와 양고기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뷔페였는데, 맛이 괜찮았다. 특히 스키야키 탕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