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May 20. 2024

제주함덕해변

  13년 전, 그리고 지금

  행사 다음날, 부산에서 친구들과 헤어져 바로 제주로 향했다. 사흘 전 먼저 가 있는 E와 3박 4일 제주에서 같이 지낼 계획이다.

해운대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길. 초행이었고 혼자였지만 전철로 이어지는 교통망이 너무나 잘 되어 있어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카톡에 저장되어 있는, E가 티켓팅해 준 항공권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13시 30분 출발, 14시 45분 도착.  제주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려 원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내판이 친절하고 적혀있는 배차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진다. 돌문화공원 앞에서 내렸다. E도 서귀포에서 이리로 오고 있는 중이다.


 기다리는 동안 돌문화공원을 둘러보았다. 지난 연말, 큰오빠 부부와 조카 부부랑 같이 들렀던 곳이다. 그때 함께 걷고 함께 사진 찍었던 넓은 공원 여기저기가 인적 없이 텅 비어 있다. 설핏 해가 기울어가는 저녁나절 이어서일까? 몇 줄기 스산한 바람만 점점 어두워지는 적막한 공기 속을 휘돌고 있다. 오빠도 올케 언니도 조카도 조카며느리도 지금 이 시간, 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열심히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시간의 흔적들은 어디에 어떻게 저장되어 있을까? 텅 비어 있는 지금 이 공간에 홀로 서 있으니 시간의 상대성과 허무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언제까지 어떤 색깔로 이어질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들. 나는 그 속에 어떤 발자취를 남기게 될까?


 E가 버스에서 내리고 낯선 땅, 제주에서 반갑게 해후한 우리 둘은 오늘 묵을 에코랜드호텔까지의 이동 수단을 도보로 선택했다. 성큼성큼 씩씩하게 첫 발을 내디뎠다. 지도에서는 꽤 가깝게 여겨졌던 길이 막상 걸어 보니 꽤 먼 거리다. 가벼운 배낭 차림의 나는 덜했지만 가방을 끄는 E는 좀 많이 힘들어 보였다. 호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할 때쯤에는 꽤 지쳐 있었다. 직원이 3층의 구석진 방을 배정하자 E가 말했다.

 "고생해서 먼 길을 걸어서 왔는데 이렇게 구석진 방을 주나요? 무슨 천로역정도 아니고 ᆢ."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 E의 반응에 나는 잠깐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잠깐 서류를 들여다보던 직원은 선뜻 방을 바꿔 주는 게 아닌가? 프론트에서 가까운 1층 방으로. 뜻밖의 호의였다.

 직원을 뒤로하고 방을 향해 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로역정이라니? 직원이 그 말 알아듣겠니? 책 많이 읽는 할머니는 달라."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호텔이 이런 곳이구나. 몰랐네.'


 짐을 풀고 객실을 나와 편의시설을 찾아갔다. 가는 길의 야경이 훌륭했다. 호수 위로 비치는 불빛과 달빛 속에 잠긴 밤은 깊고 고요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튿날, 문을 여는 10시를 기다려 주변을 산책하다 야외 온탕 수영장을 찾아갔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하늘을 담은 깨끗한 물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오후에는 테마파크 기차여행으로 곶자왈 원시림을 걷고 데크로 된 물 위의 산책길을 지나 허브랜드를 둘러보며 에코랜드의 자연과 인공을 충분히 누렸다.


 저녁나절, 함덕해수욕장으로 옮겨 갔다. 13년 전 2011년, 남편의 환갑 기념으로 아홉 명 온 가족이 다녀갔던 곳, 다시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예약해 놓은 숙소는 바로 해변 모래사장에 닿아 있는 깨끗한 호텔이었다. 그곳에 머무는 2박 3일. 발길 가는 대로 동네 구경, 시장 구경, 해변 걷기, 맛집 찾기로 편안하게 지냈다. 어린 손주들을 포함한 대가족이 렌터카 승합차로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던 그때와는 아주 다른 경험이다. 나이 먹어 마음 맞는 친구와 둘이 호젓이 보내는 여행도 나름 맛과 멋이 있다.

 함덕해수욕장의 매력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긴 해변과 넓은 바다도 한몫하지만 서우봉산이 옆에 있다는 것이다. 밀려오는 파도에 눈을 뺏기며 해변을 따라 걷다 초록으로 덮인 서우봉 둘레길로 들어서면 발길 아래 탁 트인 바다를 내려다보는 묘미가 있다.


 둘째 날은 조천만세동산에서 시작하여 신흥해변, 함덕해변을 거친다는 제주올레길 19코스를 서우봉둘레길에서부터 김녕서포구까지 걸었다. 마지막 지점의 널리 알려진 해녀식당에서 먹은 막국수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발밑을 장식하는 알록달록 야생화, 바람 따라 물결치는 들풀들, 산길을 에워싼 울창한 나무들, 자연에 둘러싸여 그냥 걷고 또 걷는 여행길. 매일 2만 보 이상을 걸으면서 둘 다 힘들다는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검색의 여왕이고 눈썰미와 기억력이 뛰어난 E 덕분에 고맙게 호강하는 여행이다. E 또한 내가 가장 편안한 동행자라고 부추겨 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긴 여정을 따로 또 함께하면서 의견을 내고 조율하고 결정하며 평화롭고 의미 있는 시간을 즐긴다. 귀중한 재산을 쌓아간다.


  김포공항에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건강을 빌어주며 3박 4일 제주여행을 마무리했다. 언제가 되든 또 함께 어디론가 출발할 날을 기약하면서.



내 마음의 사진첩

                      Jeanne Losey


내 마음의 사진첩

당신에 관한 소중한 기억들을 담고 있어요

내가 당신과 함께할 때 보았던

그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으며

당신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요


내 마음의 사진첩

우리의 추억을 보여 주지요

세월이 변화시켜 온 우리를 보여 주지요

그러나 당신은 내 기억 속에 언제나 그대로예요


내 마음의 사진첩

사진첩을 넘길 때마다

나는 소중한 기억들을 보아요


내 마음의 사진첩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지요

감긴 채 남겨진 필름처럼 우리의 과거를 담고 있지요

담겨진 모든 사진들을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작가의 이전글 남친 여친 사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