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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22. 2024

왜 달걀이 여섯 개야?

  사랑건강희망팀

 번개팅 제안이 떴다. 부부 세 쌍, 여섯 명이 함께했던 그룹 채팅방이다. 한 형제님이 이름을 붙였다. 사랑건강희망팀.

ㅡ 안녕하십니까? 금주 토요일(5/11) 오후에 남산 둘레길 산행을 하려고 하는데 가능하신지요? 출발은 14시. 충무로역 하차. 한옥마을, 백범광장, 식물원,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올 계획이며 동국대 입구역 도착 예상 시각은 17시경입니다.ㅡ

 당연히 오케이, 땡큐다. 다른 부부인 Y자매와 B형제도 1분 만에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충무로역 3번 출구에서 한옥마을로 들어와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에 이르자 빗발이 점점 굵어졌다. 준비해 온 우산을 받쳐 들고 식물원 방향으로 접어드니 비에 젖은 초록들이 더욱 싱그럽다. 날씨 탓인지 인적도 드무니 택일을 잘한 듯하다. 때죽나무 청초한 하얀 꽃들이 비를 머금은 바람의 손길에 후드득 땅 위로 떨어진다. 촉촉한 오솔길 위에 소복이 쌓여 있는 싱싱한 꽃송이들. 바로 코앞에 꽃길이 펼쳐진다.


 우산을 쓰고 걷는 오솔길. 빗속에서 걸었던 산길들이 추억 속에 아련하다. 정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빗물에 첨벙첨벙 목 긴 등산화를 잠그며 하염없이 걸어 내려왔던 어느 여름날 한라산 백록담 하산길. 산성 막걸리 생각에 우르르 어울려 올라갔다 우산도 등산화도 없이 봄비에 젖은 미끄러운 길을 흠뻑 젖어 내려왔던 학교 뒤 금정산 오솔길.

 골이 깊어야 경관이 좋다고 했던가? 힘들게 보낸 시간들이 더 깊이 새겨지는 모양이다.


 아스팔트 길을 끼고 넓은 인도를 한 바퀴 쭈욱 도는 남산 산책길과는 완전 다른 느낌이다. 도심에서 만나는 깊은 숲 속. 노란 창포꽃이 만발하고 비를 맞아 깃털에 윤기가 도는 오리들이 한가로이 떠 있는 연못. 길 옆을 따라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은 듯 다른 팔도 소나무까지 눈여겨보며 호젓한 산길의 정취에 푹 젖었다. 예쁘다, 멋있다, 좋다, 감탄사 연발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내려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돼지족발빈대떡집. 조금은 으스스 한기가 도는 오늘 날씨, 딱 어울리는 장소다. 막걸리를 곁들여 푸짐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은 음식은 형님을 챙기는 A와 Y의 권유로 똘똘 포장되어 내 가방에 담겼다.

 며느리가 선물한 상품권 카드로 스벅 커피를 쏘겠다는 B형제의 강한 의지를 완곡하게 사양하고 근처 약국에서 구입한 광동 쌍화탕 한 박스씩을 검은 비닐봉투에 담아 들고 귀가했다. 이런 날은 뜨끈한 쌍화탕 한 병씩을 먹고 푹 자야 한다는 A의 산행 철학 덕분이다.

 미처 가방을 풀기도 전, 회비가 아직 75,700원이 남았다는 회계님 A의 보고가 올라왔다. 오늘의 소감도 빠뜨리지 않았다. ㅡ빗속의 운치 있는 남산 둘레길의 초록과 예쁜 꽃들과 데이트를 한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함께여서 더욱 행복했습니다~♡


 우리 세 부부가 이 모임을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모두 달랐지만 성당에서 반장, 구역장, 선후배 인연으로 엮어진 우리 세 여자들의 인연에 남편들이 합류했다. 단체 행동은 산행. 맨 첫 산행지가 우이령이었다. 산행 대장을 맡은 C형제가 입산 예약을 하고 교통편과 산행길 안내를 맡았다. 세 집이 각각 담당할 먹거리를 카톡으로 알리며 겹치지 않게 조절하였다. 가장 젊었기 때문일까? A네 부부는 둘 다 배낭 가득 먹을 것을 챙겨 왔다. 찰밥과 쌈야채와 쌈장, 휴대용 개인 그릇과 수저, 커다란 보온 들통에 담은 따끈따끈한 돼지고기 두부김치찌개까지. 카톡방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던 항목이다. 힘든 산행길에 상상을 뛰어넘는 두 부부의 티 내지 않는 헌신에 정말 깜짝 놀랐다. 덕분에 오래 기억에 남아 생각날 때마다 입에 올리는 그날의 점심, 푸짐했던 야외 밥상.


 이후 수시로 여섯이 함께 가벼운 산행을 즐겼다. 매봉산, 청계산, 우면산, 관악산, 삼성산, 북한산, 안산, 서리풀 둘레길 ᆢ.  새해 첫날 새벽, 어둠 속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구청이 주최하는 신년 해맞이 행사에도 참석했다. 넓은 마당에서 구청에서 준비한 떡국도 먹고 뜨끈뜨끈한 떡도 한 덩이씩 받고 다시 식당에 들러 아침 식사를 하던 연례행사. 전화 한 통으로 함께 모여 짬짬이 들렀던 동네 두부 요릿집, 생선구이집.

 3년을 함께 살던 둘째네 네 식구가 분가하고 아들마저 결혼으로 집을 떠나간 훌빈한 날, 적막한 고요에 젖어 있던 우리 부부를 불러내어 술과 식사로 아픈 마음을  다독여 주었던 그날의 고마움은 오래오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줄 보석이다.


 2018년 여름, 우리가 함안살이 2년을 떠나고 코로나가 이어지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반년 후 남편이 암진단을 받고 2년 반 투병을 하는 동안 남편에 의향에 따라 모든 모임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겪는 동안 변함없이 많은 사랑과 깊은 관심으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작년 한글날, 강화봉안당까지 함께 방문했다.

 올봄에는 과천 보광사 나들이를 거쳐 경관과 맛이 뛰어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나를 위한 칠순 축하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꼬마케이크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다시 함께 뭉치자고, 산행을 시작하자고 생각들을 모았다. 비록 남편의 자리는 비었지만 애써 그 부재에 연연하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거움은 속으로 삼켰다. 재출발의 첫 목적지로 과거의 첫출발을 추억하며 우이령을 선택했다. 5월 1일, 노동자의 날.


 배낭을 메고 우이령으로 향하는 복잡한 전철 안에서 행동파인 B형제님이 또 새로운 계획을 제의했다. 6월에는 1박 2일 태안구청휴양소로 떠나자고. 만장일치로 오케이. 바로 그 자리, 복잡한 전철 안에서 핸드폰으로 숙소 세 채 예약을 끝냈다. 송금도 하고.  

 연꽃 피는 7월에는 세미원으로, 좋아요.


 10여 년 전 그날에 비해 우이령 고갯길은 더 그윽해지고 산들은 더 깊어진 듯했다. 멀리 보이는 오봉산의 맑은 모습과 5월 첫날의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그늘진 평지에 점심상을 차리며 Y가 아침나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찐 달걀을 맡은 Y가 준비해 놓은 달걀 여섯 개. 배낭을 꾸리려던 남편 B형제가 말했다.

 "왜 달걀이 여섯 개야?"

 그 순간 멈칫하며 Y가 말했다.

  "아! 그러네요."

 

 달걀 여섯 개에서 필요 없어진 달걀 하나.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속으로 서늘한 강물 한 줄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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