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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27. 2024

난 네가 기뻐하는 것이라면 ᆢ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 작.

국립중앙도서관. 초록의 정갈한 뜨락에 팔락 팔락 하얀 현수막이 한가로이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현세, <공포의 외인구단>.


 순간 40여 년 전으로 훌쩍 날아가는 감성. 이름만 들어도 뭉클해지는 그 무엇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ㅡ

 3부 30권, 장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사이며 바로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다. 1983년 완간되었으며 1986년 영화로 제작되어 배우 최재성을 단번에 일류스타로 만든 대작. 영화 ost로서는 최초로 KBS 가요톱 10 골든컵을 차지한 정수라의 노래 <난 너에게 >로도 유명하다.


 1층 전시실로 들어섰다. 맨 처음 만난 사진은 경주 만화방.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골목 끝 대로변에 있었던 그 옛날의 만화방 풍경이 바로 그려진다. 1956년에 태어난 작가와의 60년대 공통된 추억. 부산이었으니 경주와는 조금 달랐지만 드르륵 옆으로 열고 들어가는 여닫이 유리문의 모습은 똑같다. 그 조그만 유리창 칸칸마다 가운데를 고무줄로 고정시키고 그 사이에 새로 나온 만화 표지를 끼워 놓았다. 제목이 바깥을 향하게. 그 앞을 오가며 신간을 빨리 보고 싶어 마음 졸이기도 하고 지난번에 읽었던 만화의 후속 편이 나왔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10원이었을까? 1원이었을까? 만화방 아저씨에게 돈을 내밀면 그 돈으로 볼 수 있는 만화책 권수만큼 표를 주었다. 마분지를 오려서 그 위에 도장을 찍은 소박한 티켓. 그러나 그때 우리들에게는 보물 같았던 쪽지. 그 종이를 한 장씩 건네며 찜 쪄 두었던 만화책들을 골라 읽었다. 벽에 붙여 놓은 기다란 나무 의자에 불편하게 걸터앉아서. 바닥은 먼지 풀풀 나는 흙이었다. 아저씨가 간혹 물조리개로 물을 뿌릴 때면 발을 들어 올리기도 하면서 만화 삼매경에 빠졌던 곳. 지금도 기억나는 만화는 <슬픈 옥이>. 내용은 아련하지만 제목 그대로 슬픈 순정만화였으리라.


 <공포의 외인구단>이 발간된 1980년대, 그 무렵에는 동네 만화책 대여점에서 왕창 빌려와 머리맡에 재놓고 방바닥에 배를 고 한꺼번에 다 읽어냈을 것이다.


 까치와 엄지, 오혜성과 최엄지.

 엄마도 없이 술주정뱅이 아버지한테 얻어맞아 가 자라는 오혜성. 냄새난다며 짝꿍이 되는 걸 모두 꺼리는 까치 머리. 그에게 새로운 짝꿍이 된  엄지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까치의 성적이 올라간 걸 칭찬해 주고 생일을 묻는다. 생일을 알 리 없는 까치는 떠오르는 대로 대답한다.

 "10월 10일."

 자기도 잊고 있었던 생일날, 엄지는 까치를 초대해 과자로 소꿉장 같은 케이크를 꾸며 주고 소질이 있는 야구를 해 보라며 야구공을 선물한다.

까치는 결심한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ㅡ

 평론가들은 말한다.

이현세의 스포츠만화는 스포츠와 동시에 드라마를 진행시키며 불완전한 부성과 모성을 보여준다. 그 자리에 여자 주인공이 대리모성을 보여 준다.ㅡ


 오래전, 교사용 국어 학습교재에서 이현세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주 인상 깊었기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내용이 조금은 기억된다.

 

 작가는 아주 어릴 적,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댁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 사실을 모르고 친아버지를 작은아버지로 부르며 자랐던 소년. 큰아버지가 농지개량 사업에 실패하여 빈털터리가 된 상태에서 세상을 뜨고 작은아버지인 친아버지가 작가가 지내는 큰집 경제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쪼들리는 살림 속에서 간혹 들르는 아버지의 아들, 현세에게 향하는 사랑이 어떠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작가는 어느 날 크레용을 사기 위해 작은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을 다른 데 다 써 버리고 다시 크레용을 사야 한다며 돈을 청했다. 돈이 궁했던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돈을 주었다. 그 아버지가 근무하던 직장에서 감전사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사망 후에야 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린 소년. 아버지의 남몰래 감춘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쪼들리는 살림에 없는 돈까지 아버지를 속여가며 타냈으니 한 번도 사랑을 표현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아들의 마음은 너무도 참담하고 슬펐다.


 그 한스러웠던 감정이 작가의 모든 작품에 녹아 있나 보다.


 초등시절, 혜성에게 유일한 양지였던 엄지는 전학을 갔다. 고1 때 우연히 야구장에서 다시 만난 엄지와 혜성. 그때 엄지는 야구천재라고 불리는 마동탁과 교제 중이었다.

 동탁과 혜성, 두 남자의 처절한 승부욕이 불꽃을 튀기기 시작한다.


 혜성이 프로구단 서부에 입단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 전날밤 술 마시느라 차비까지 탕진해 버린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은 무임승차를 감행한다. 들키지 않으려고 기차 맨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검표원에게 발각된 순간, 아버지가 난간에서 밀려나 달리는 기차 끝에 간신히 매달리자 아들은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를 껴안고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다행히 떨어진 곳이 눈밭이어서 아버지는 멀쩡했지만 아들의 팔뚝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깨를 다쳤지만 팔꿈치를 약간 긁혔을 뿐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아들.

 입단 면접 시간,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죄책감에 쌓인 아버지. 아들은 연봉 계약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숙식만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입단을 허락받는다. 아버지는 다시 술을 마신다.

 '아비가 되어 자식 놈에게 해 주는 건 하나도 없고ᆢ.'

 아들에게 잘못을 빌겠다며 숙소로 돌아오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혜성은 면접장에서 아버지를 실망시킨 손감독에게 분노의 복수를 결심한다.


 동탁은 막강한 유성구단에 입단한다. 유성 회장 외동딸과 연애를 즐기는 동안 엄지와 까치는 미래를 약속한다. 까치는 투혼을 불사르며 연습에 임한다. 프로야구 시즌 첫 경기에서 빛나는 존재로 부상하지만 그날 하루의 경기 끝에 가치는 어깨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간의 무리로 인대가 파열된 것이다.

 하루 천하. 처절한 실망과 좌절에 빠진 까치. 손감독이 손을 내민다. 무인도에서 이루어질 지옥 훈련에 초대한다.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아주 마음에 드는 눈동자를 가진 까치에게 그가 말한다.

 "넌 야구를 하지 않으면 범죄를 저지를 거야."

 까치는 초대에 응한다.


 2년 간 계속된 상상을 뛰어넘는 무인도에서의 지옥 훈련. 발목에 철각반이 채워진 채 인간으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독한 훈련, 생명의 위협을 수반하는 위험한 훈련을 휘두르는 채찍에 몰려 죽을 각오로 덤벼들었다. 편지 한 장도 허락되지 않았다.

 6개월 후, 가을 시즌이 시작되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까치가 감감무소식인데 반해 회장의 외동딸과 깨어진 동탁은 100개 연속 안타를 사랑하는 엄지에게 바친다는 공개적인 열렬한 구애를 퍼붓는다. 둘은 결혼한다. 아들 현수가 태어났다


 2년 후 나타난 여섯 명의 死者들. 그중 한 명, 까치. 손감독은 프로야구전에서 모든 게임을 전승으로 끝낸다는 조건으로 서부구단의 24억 후불 연봉을 계약하고 처절한 승리의 기록을 쌓아간다. 연속되는 패배에 무너지는 마동탁의 자존심, 흔들리는 승부욕. 까치의 채워지지 않는 갈증.

 편지만 할 수 있었더라면 ᆢ.


 한강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서에 연행되어 있는 남편 동탁을 보고 엄지는 결심한다. 까치에게 한 번만 져 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엄지가 와 달라고 부탁한 고향 언덕. 내일 있을 경기를 앞두고 비에 홀딱 젖어 밤길을 가며 까치는 생각한다.


 ㅡ고향, 내 고향.

언제나 꽃길처럼 그려지는 곳.

엄지, 네가 없었어도 나는 이곳 고향에 갈 수 있었을까?

천만에, 너와의 추억이 있었기에 내 고향이고

네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에 이렇게 콧등까지 시큰해진다.

너와 내가 함께 다니던 학교, 저 언덕.

우린 항상 거기서 만났지.

어떤 때는 마냥 저 뚝길을 달리기도 했고ᆢ.ㅡ


 전승을 앞둔 프로시즌 막바지 경기, 혜성은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몸으로 8회 초까지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9회 수비전에서 혜성은 동탁의 날아오는 공에 몸을 던져 두 눈 사이 미간에 맞고 쓰러진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엄지는 정신줄을 놓는다.

  "혜성아! 아, 혜성아!"


  유성구단이 드디어 1승을 거둔다. 선수 대기실로 들어오는 혜성을 향해 날리는 손감독의 일격. 퍼펙트게임, 눈앞에 둔 전승 신화를 망쳐 버린 어리석은 놈. 24억의 계약금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응급실로 실려간 혜성에게 내려진 진단은 식물인간이 되거나 실명한다는 것. 그날밤 손감독도 유명을 달리했다.

 손감독과 혜성이 빠진 서부구단이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선수복에 검은 리본을 두른 그들은 마동탁이 빠진 유성을 이긴다.


 엄지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 실성한 엄지와 엄지의 동생 현지의 손에 이끌려 엄지를 찾아온 까치. 이 둘이 만난다.

  "오빠, 손을 뻗어 봐요. 이젠 만져 봐도 돼요."

 "언니, 오빠는 눈이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놀라지 마."

 천천히 까치의 품에 안긴 엄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흐느끼는 엄지. 검은 안경 속에서 허공을 더듬는 까치가 말한다.

 "어쩌면 엄지,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던 거야."


 두툼했던 만화책 더미 대신 유튜브를 열었다. 다행히 쉽게 바로 뜬다. KBS 라디오 컬처 특집 오디오 웹툰 드라마 <공포의 외인구단>.

 노련한 성우들의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매혹적인 목소리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효과음향들이 단번에 그때 그 시절의 감동으로 데려갔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별보다 예쁘고

꽃보다 더 고운 나의 친구야

 세상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야


네 곁에 있으면 사랑은 내 것

네 곁에 있으면 세상도 내 것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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