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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28. 2024

함께 늙어 함께 묻히고 싶은ᆢ

 <飛天舞> 김혜린 작

 <공포의 외인구단>에 대한 진한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또 한 편의 순정만화 <비천무>가 생각난다.

 1956년생인 이현세는 1983년 스포츠 순정만화 30권, <공포의 외인구단>을 완간했고 1962년생인 김혜린은 1991년 서사무협 순정만화 13권, <비천무>를 완간했다.


 나는 1999년에 전 6권짜리 <비천무>를 읽었다.

 그 시절의 일기장을 들춰 보니 대학 노트 5페이지에 걸쳐 감동과 필사가 기록되어 있다.


 ㅡ1999년 9월 20일, 월요일. 비 많이 내리는 오전 11시.

 둘째 Y는 9월 18일, 우리들의 결혼 기념 22주년 되는 날, 서울대 경제학부에 교장추천 수시입학 논술고사를 치렀다. 큰 실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제 10월 4일 있을 1차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마음은 담담하다. 굳이 떨어질 이유는 없는 듯하다.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시험을 끝내고 Y는 친구랑 영화 보고 외식하고 만화를 한 보따리 빌려서 들고 왔다.

 그중 나에게 권한 무협순정만화 <비천무>. 전 6권. 김혜린 작.

 진하고 뜨겁게 그리고 처절하게 결코 타협하지 않는 칼날 같은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살얼음 걷듯 걸어가는 이들의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ㅡ


 마지막 페이지에는 신문 기사의 스크랩까지 풀로 붙여져 있다.


 비천무 (하늘을 오르는 춤)


 호북 유가의 마지막 혈손으로 비천신기를 노리는 무리들에게 멸문지화를 당한 소년, 자칭 삼촌이라는 호위무사의 보호를 받으며 도피 은둔의 삶을 사는 진하.

 병약한 첩실인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고 있는 소녀 설리.

 이들은 산매라는 마을에서 만난다.


 ㅡ저, 나는 설리(雪莉)야. 타로가 설리. 너는?

 

 진하(珍河).


 무언가 가슴 아린 그 느낌이 외로운 사람끼리의 습기ᆢ라는 것을 14세 동갑내기 소년 소녀는 아직 몰랐다.ㅡ


 때론 형제로, 때론 연인처럼 보낸 3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딸을 찾아온 아버지는 본가인 소흥으로 설리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소흥의 재력가 남궁준광과 혼인을 맺는다. 진하가 죽은 줄로 아는 설리는 아들 성과 딸 연을 낳고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다 전쟁통에 딸 연을 잃고 아들 성을 탈출시킨다.  


 진하는 자하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객의 삶을 산다. 배신당하고 고문을 겪고 감옥에 갇히고 탈출하는 험난한 여정에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한다.

 무예에 뛰어나며 피리 연주의 달인이다.


 진하가 창설하여 만든 철기십조의 부총관을 맡아 진하의 인간성을 흠모하며 그를 끝까지 따르고 돕는 하창룡. 그와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마지막 헤어지는 시간, 진하가 던지는 한마디 인사.

 "하창룡! 쟈이젠(再見)."

 그 짧은 대사에 한동안 마음이 머물렀다.

 서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임을 알면서 나누는 마지막 인사. 다시 보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 다시 만난다는 것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여정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다ᆢ.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무사의 길을 떠돌다 진하를 만난 설리의 아들 성은 로부터 유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무예서 <飛天十二技>를 전수받는다. 부자지간이라는 그들의 인연을 둘 다 모르고 있다.

 혼란의 전쟁터에서 진하와 설리가 조우한 어느날,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아들 성이 사실은 진하, 당신의 아들이라고.


 절강성 소흥의 제일 오래된 정자에서 보름 때마다 진하를 기다리기로 한 설리의 약속을 기억하며 진하는 간장을 녹이는 그리움을 속으로 삼킨다.


 ㅡ만나고 싶어, 미치도록 만나고 싶어 그냥 간다. 지척에서 그대를 보게 된다면, 너의 손을 다시 한번 잡게 된다면 나는 한순간에 모든 마음이 무너져 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쓸쓸한 산야에서 홀로 까마귀 밥 되기가 무서워질 테지. 연홍의 휘장, 불 밝은 창, 달디단 술내음. 아무리 짧은 찰나라도 그대의 팔 속에서 그렇게 죽어 가기를 꿈꾸겠지. 그 아이도 한 번쯤은 날 아비라고 불러 줄지도 모르고. 광인처럼 산매를 중얼거리며 난 또 피리를 불고 싶어지겠지.ㅡ


 진하와 설리의 남편, 남궁준광이 맞붙은 최후의 결투에서 남궁준광은 목숨을 잃는다. 성이 자신의 아들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성과 설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회복 불능의 상태로 몸이 망가진 진하와 삶을 함께하지 못했다면 죽음이라도 함께하겠다며 설리는 길을 떠난다.

 떠나기 전, 아들 성에게 편지를 남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연이 짧은 부모 자식이었구나. 이 엄마가 널 낳았고 사랑했고ᆢ 너무나 위로받았지. 하지만 네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난 네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그저 끝없이 생각하는 게 내 유일한 힘이었지. 이제 다시 널 버리게 되는구나.

 어미는 오늘 많이 울었다.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갈 길을 서둘러야겠다. 망부의 장례도 재도 치르지 못한 채 자식에게 업만 남기고 뛰쳐나가는 미친 여인네! 이해해 달라고도 용서해 달라고도 않으마.

 세상 모두가 욕하고 손가락질하여도 지금 가지 않으면 어미는 영원히 그와 함께 가지 못한다ᆢ. 천일야를 지새워 지난 세월을 읊은들ᆢ 일만 송이 말리꽃(재스민)의 눈보라를 노래한들ᆢ 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대체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성아, 성아ᆢ 성아!

 아아ᆢ 내 아들아! ㅡ


  설리는 진하를 노리는 몽고족 용병의 화살을 막고 진하의 품에서 죽는다. 진하는 몽고 병사와 최후의 칼부림을 하고 그들을 모두 죽인 뒤 자신도 죽는다.

 그들의 마음의 고향, 산매를 그리워하며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죽는다.


 ㅡ 이 손을 다시 잡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을 우리는 돌아서 온 것일까? 그대와 함께 놀고 그대와 함께 묻히고 싶은 꿈이 그다지도 큰 욕심이었는지. 생을 함께하지 못했다면 죽음이라도 함께ᆢ.ㅡ


 진하와 설리가 만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마을, 진하가 살던 산매의 오두막 앞에 그들이 사랑의 증표로 나누어 가진 옥경과 함께 아들 성이 그 둘을 묻어 준다.


 ㅡ모든 감정은 뒤엉킨 채 아득한 슬픔만 남고ᆢ. 무엇인지! 이 기묘한 감동은? 저분들께도 나와 같은 설익은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세상에 대해 갈등하고 그러면서 살아가고! 어떤 형태로든 한껏 사랑받았고 헤일수없이 많은 것을 배운 나는 행복한 놈인 거야. 더는 투정 부리고 방황하는 못난이가 될 수 없는 거지.

 이상한 슬픔ᆢ

 이상한 외로움ᆢ

 이것이 어른이 되기 위해 걸머져야 하는 천형(天刑)의 등짐인 것일까?! ㅡ


 <외인구단>과 <비천무>에는 공통점이 많다.

 운명처럼 이루어진 순수한 첫사랑, 언제까지나 잊지 않는 순정, 전쟁과 야구라는 격전에서 맞붙는 두 연인, 험한 세파의 격랑을 헤쳐 나오며 입는 뜨거운 상처들, 많은 것을 잃고 너무나 늦게 다시 맺어지는 연인들, 흐르는 시간 속에 녹아있는 인간들의 희로애락애오욕, 그 흐름을 관장하는 운명의 힘, 순명과 인내의 끝에서 모두를 내려놓고 만나는 평화.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연약함과 고단함에 사랑이 없다면 그 무엇이 위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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