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행사에 여권 사본을 보내고 계약금을 송금했다. 5월 말에는 여행 경비 잔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출발일인 6월 28일. 오전 6시 30분까지 인천공항으로 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경북 경산에 사는 J는 전날 밤 우리 집에 와서 하루를 묵었다. 이른 새벽 텅 빈 거리를 덜덜거리는 캐리어 소리도 요란하게 20여 분 도보로 씩씩하게 걸었다. 4시 40분 공항버스에 올라서야 1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풀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는 인솔자인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에 잘 따르면 그만이었다. 궁금한 것은 물으면 되고.
350만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산다는 수도 울란바토르에서의 역사 탐방, 홉스골 호수에서의 물멍 별멍 숲멍, 테렐지 국립공원의 드넓은 초원 구릉 구석구석에 보석처럼 뿌려져 있는 야생화 감상.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이어가고 있는 전통문화 체험.
1인당 국민소득 5천 달러라는 그들이 뿜어내는 여유와 넉넉함이 3만 7천 달러라는 우리들의 팍팍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일상과 많이 비교되는 여행이었다. 땅을 밟고 사는 사람들과 시멘트를 밟고 사는 사람들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게르 전통가옥에서 혼자 의젓하게 수십 명의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어린 소녀, 바쁘게 오가며 숙소 청소와 비품들을 챙기고 많은 음식을 날렵하게 준비하는 남녀 청춘들, 승마 관광객들의 말을 몰며 안전을 돌보는 남녀노소 목축 원주민들. 모두 경쟁과 평가에서는 제외된 듯 긴장 없이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며 성실하고 진지했다. 자연도 좋았지만 사람들의 소박한 분위기가 힐링의 한몫을 톡톡히 차지했다.
몽골여행, 이 한마디에 친구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별이었다.
"별구경 잘하겠구나~!"
과연 별이 쏟아지는 홉스골 호수의 밤하늘은 은하수와 북두칠성과 크고 작은 별들로 가득 찼다.
1970년대, 80년대 경남 함안 시댁에서 바라본 밤하늘도 별들로 가득했다. 어쩜 더 많이 빛나고 더 풍성했던 듯도 하다.
여름휴가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뵙던 한여름 시골 시댁.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텃밭 깻잎을 따서 전을 부치고 서툴게 반찬을 마련하여 세끼 밥상을 차려내고 설거지를 하다 보면 사흘이 그냥 지나갔다.
깜깜한 밤이 되면 남편은 준비해 간 망원경으로 마당에 놓인 나무 평상 위에서 어머님과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며 담소를 나눴지.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망원경을 조작해 드리며 덧붙이는 30대 아들의 친절한 별자리 이야기에 50대 어머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연달아 감탄사를 연발하곤 하셨지. 아버님은 조용히 방 안에 머무시고.
평상 한 귀퉁이에 걸터앉아 고개 들고 바라보던 까만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보석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렸다. 밝고 맑고 찬란하게 쏟아지던 별빛. 몽골 홉스골 호숫가의 나무 의자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40년 전 경남 함안 시댁 마당의 평상에서 바라보던 하늘과 똑 닮아 있었다.
많이 개발된 테렐지 국립공원의 밤. 환하게 밝혀진 조명등 불빛들로 푸른 밤하늘의 별빛은 저만치 멀리 희미하게 밀려나 버렸다. 조금 떨어진 숲 속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청년들의 꺼지지 않는 불빛과 음향기기 소리, 본관 건물의 방음되지 않은 노래방에서 왕왕 울려대는 시끌벅적한 노랫소리가 밤늦게까지 온 초원의 고요를 뒤덮었다. 저녁나절에 혼례예식이 있었던 듯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축이 된 한 가족의 흥겨운 뒤풀이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인간들의 천박한 물질문명은 밤의 장막 속에서 점점 더 무례하게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침범해 갔다. 뜨끈뜨끈한 난방과 샤워시설,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어진 2인 1실의 게르 숙소는 현대판 호텔이었다.
이튿날 아침, 무례한 인간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의 상쾌함 속에서 자연은 자신의 위엄을 되찾았다. 드넓은 초원 구릉들을 카펫처럼 뒤덮고 있는 짧은 초록의 풀들과 오색 영롱한 야생화들이 만들어내는 천국. 해뜨기 전, 아직은 이슬이 머물러 있는 시간, 증발되지 않은 촉촉한 물기는 그들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돋보여 주는 수호신이었다. 지난밤 인간들의 횡포에 숨죽였던 그들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뽐내었다. 찬란하게 밝아 오는 새벽의 신선함 속에서 오롯이 본연의 자태를 드러내는 야생화들. 우아한 보랏빛 할미꽃과 엉겅퀴꽃, 선명한 다홍색 나리꽃, 노랗고 여린 미나리아제비꽃.우리 눈에 익숙한 야생화들이라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기품 있게 여기저기서 얼굴 내밀고 있는 하얀색 에델바이스꽃 무더기는 여기가 몽골임을 말해 주었다.
숲의 싱그러움도 빼놓을 수 없다. 데크도 야자수 매트도 인공으로 조성한 무더기 꽃밭도 없이 오직 자연이 이루어 놓은 신성한 숲. 인간이 남긴 자취로는 그들이 밟고 지나간 풀들 위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뿐이었다. 순수한 자연 속에 안긴 편안함. 아, 이런 것이 힐링이라는 것이구나. 숲의 정령은 이런 곳에 머물겠구나. 1년의 반 이상 지속되는 긴 겨울과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혹한을 지나온 강인한 생명들이라 더욱 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게르에 머물며 바라보았던 밤하늘의 별, 쉼 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며 일렁이는 잔물결과 찰싹이는 물소리를 만들어내는 넓고 깊은 호수,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게르 뒤쪽을 돌아 혼자 들어가 본 새벽녘 숲, 툭 트인 초원의 구릉지를 한 발짝 한 발짝 옮겨가며 만난 선명한 야생화들.
홉스골에서의 2박, 테렐지 국립공원에서의 1박. 사흘 간의 게르 숙박에서 만난 자연의 신성함은 어느덧 잔잔한 그리움의 강물이 되어 내 마음속을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