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아 물리치료사 란?

예비 장애아동들을 정상발달에 가깝도록 도와주는 사람

물리치료사라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다. 의사들에게도 다양한 영역이 있듯이 물리치료에도 수많은 영역이 존재한다. 물리치료학과의 선택을 고민하는 많은 후배들에게는 그저 물리치료학과는 추천할 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갈 수 있는 분야도 많고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매우 넓기도 하다. 대상자 또한 산모, 노인, 아동, 이른둥이, 영구적이거나 일시적 장애를 가진 환자, 환자의가족, 직업병을 가진 환자, 건강관리를 필요로 하는 일반인,  운동선수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앞으로도 물리치료의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영역과 접목하여 탐구해야 할 영역이 너무 많다. 치료사들이 그래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재활의학과라는 이름으로 입학을 하여 물리치료학과라는 이름으로 졸업을 하여 물리치료사가 되었다. 1996년 나의 입학 시절 이야기다. 그 당시에는 재활이라는 말은 재활용을 떠올리게 하는 말 정도로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인식이 없었다. "가까운 미래에는 그런 것도 필요하겠네. 재활용 학과" 친척 중 한 분의 말이었다(웃음). 부끄러웠다. 내가 간 학과의 명칭을 정확하게 수정하고 싶었지만 재활용 학과보다 더 설명하기 어려워 포기했어야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학기 휴학을 하고 2000년 여름에 졸업을 하였다. 물리치료사가  갈 수 있는 길이 그리 많지 않아서 종합병원 혹은 준종합병원, 정형외과 그리고 복지관 정도에서 선택해 볼 수 있었다. 요즘은 그보다 훨씬 다양한 방면으로 뻗어나간 후배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 미국과 호주 등지에 가서 물리치료사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며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3D 프린터기로 만들 수도 있는 의료장비를 만들어  파는 기술과 접목할 도 있으며, 재활치료를 위한 로봇 제작 분야와 접목할 수도 있으며, 사람의 인체에 가장 가깝도록 동작분석을 하는 분야까지 너무나 광범위한 분야에서 우리의 지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열심히 묵묵히 걸어간 선배와 열심히 그 길을 넓혀온 후배의 역할이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라 여긴다. 그중 나는 장애아동을 치료하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첫 치료를 시작하였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그 당시에는 하지 않았다. 그저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주말 또는 방학에만 집에 갈 수 있는 장애를 가진 예쁜 아동들과 함께 살아가고 즐겼을 뿐이었다. 그 당시 나의 즐거움은 아이들과 함께 놀이처럼 치료를 해나가는 과정이었으며 함께 웃고 떠들 때는 그들의 장애가 장애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기도 한 것 같은데 그런 내가 그들에게는 편안했던 것 같다. 30살이 넘은 중년의 아저씨가 된 그들이 20년이 흘러도 연락이 오고 있으니 말이다. 5년 정도 그곳에 있었을 때 문득 내 치료는 과연 잘하는 치료인가라는 물음표가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원을 가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도 모자라서 목이 아파 두통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결혼을 도피처 삼아서 여러 가지 상황에 이끌려 떠나게 되었다.


이후 아이를 낳고 기르며 요양병원에서 어르신들을 치료하였다. 장애아동을 치료하다 말고 갑자기 요양병원 어르신들을 치료하다니 이상하게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저 한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분야를 접해 보고 싶었고 대학원을 다니는 나에게 시간의 편리도 봐준 곳이어서 택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5살이 되어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증세를 보여 육아휴직을 내면서 그만두었다. 휴직을 한 그날부터 아이는 내 품에 안겨 깊은 잠이 들 수 있었다. 내가 택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육아휴직이 끝날 때쯤 둘째를 낳게 되어 연달아서 육아휴직을 내고 충분한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자연스레 둘째가 4살 즈음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통증치료를 하는 요양병원에 이어서 정형외과를 다녔다. 어찌 보면 정형외과는 내가 가장 기피하는 분야여서  그동안 문도 두드려보지 않은 분야였다. 너무 힘들 거라는 짐작이 앞선 곳이기도 했고 운동치료 분야를 선호하기도 했던 탓이다. 그러나 정상인들의 통증을 조절하는 치료를 배우는 것이 필요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장애가 아니라 장애가 몸속에 있는 경우 어떻게 치료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정형외과는 예상했던 대로 너무나 힘들었지만 루틴(초음파+핫팩+전기치료+ 간간히 견인과 파라핀+간간히 간단한 도수치료)만을 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공부가 많이 필요했다. 대가 변하여 도수치료 분야가 그야말로 병원의 수지타산을 맞추어주는 최고 경지에 올라 있었고 대세는 도수치료였다.  도수치료를 배우러 매 주말마다 공부를 하러 다니기 바빴고 치료하는 틈틈이 배운 공부를 외우고 써먹기 바빴다. 여기저기 아픈 곳은 많아졌지만 배울수록 알고 싶은 게 많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첫발을 들였던 장애아동 치료를 하면서 답답해하던 모든 것을 해소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거주지를 세종으로 옮기게 되면서 연스럽게 그곳에서도 떠나오게 되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며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구직활동을 하던 와중 뜻밖에 아동 재활치료를 하는 복지관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토록 오고 싶었던 복지관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게 된 것이 신의 뜻 같았고 좋았다. 여기에도 숨은 복병이 있었다. 물리치료사는 나 하나뿐인데 아동 재활치료는 물리치료뿐 아니라 수중치료와 그룹운동치료를 병행해야 하였고 더불어 지체장애( 뇌병변 장애, 지적장애를 동반하지 않은 근육병, 척수손상 장애) 아동만을 치료했던 내게 너무나 생소했던 자폐성 장애, 지적장애, 지적장애를 동반한 유전병을 가진 아동들을 치료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혔고 쏟아지는 평가서와 씨름을 해야 했다. 쉽지 않았고 포기하고 싶었다. 사실은 많이 울기도 하였다. 3개월이 3년 같이 느껴졌다. 모든 치료사가 이렇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장애아동과 그 부모들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 함께 헤쳐나가고 싶은 그 답답한 마음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뼈아픈 고통만큼이나 해답을 찾고 싶은 갈망은 더욱 깊어졌으며 찾기에 나섰다.


소아 물리치료사로서 내가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복지관 안에서도 물론 물리치료사로서 나의 역할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계가 존재한다. 치료 타이밍의 한계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복지관은 평가를 통해 대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인데 대기하고 치료를 받는 데까지 족히 3~4년은 걸린다. 안타깝다.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2.5kg 이상 36주 이상의 뇌출혈이 없는 아동이라면 괜찮다) 12개월 이전에 치료받아서 최대한 정상 발달을 빠르게 쫒아가서 느리더라도 꼭 필요한 과정을 거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병원의 실정은 발달과정을 평가하는 시기가 매우 늦다. 형식적인 영유아 발달 검사로는 판별이 어렵다.


아기들의 부모들은 다른 아이와의 차이를 벌써 출생 후 2~3개월부터 느끼는데 병원에서는 달리 처방을 해주지 못한다. 기다리라는 답변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가장 중요했을 출생 시부터 12개월이라는 골든 타임을 놓치고

 기기와 걷기가 늦어지면 그제야 조심스레 발달지연이 의심은 되지만 늦는 경우도 있으니 지켜보라는 정도로 얘기하며 평가를 또 지연시킨다. 치료는 자꾸 늦어지며 겨우 복지관이나 사설치료실을 빠르게 오는 부모들의 경우가 생후 12~18개월 정도 사이가 되지만 대기를 거쳐서 들어오게 되면 약 2~4년 정도는 훌쩍 지난 후가 된다.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20년간 아이들의 성장과 노화를 겪어본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재활의 시기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어땠을까?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매 순간 치료를 하면서 느낀다. 만 18세 자폐아동을 치료하면서도 조금만 더 일찍 우리가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든다.


아직 우리나라는 12개월 미만의 아기들을 조기에 치료하는 시스템이 미흡하며 전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치료사도 극소수이다. 왜냐하면 소아과, 산부인과 같은 병원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는 과는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소아재활치료 영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애아동 전문 소아 물리치료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이들의 발달이 늦어지고 있는 게 이제 눈으로 보이며 빠른 치료적 도움을 주면 저 아이가 조금 빨리 기거나 걸을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들이 자주 온다는 것이다.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블로그를 통해 나도 배우고 있으며 알아가고 있는 과정이지만 연차가 무려 20년 내공이라 그런지 감이 탁탁 온다. 실전은 훨씬 어렵고 난해한 과정일 거라는 것은 매 치료시간 40분의 사투를 벌이는 나로서는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안다. 어렵다고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말이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지 스스로에게 매일 물었고 매일 해답을 찾았다.

결국 이제야 찾은 것 같다. 45살 구정 첫날에 말이다. 발달의 지연이 의심되는 12개월 미만의 아기들(특히, 이른둥이들)이 정상발달 과정을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도록 조기에 치료할 수 있는 소아 물리치료사가 되어야겠다. 

 나의 시작은 미약할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죽을 때 이 분야에서 내 이름 석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가지는 꼭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제 의사들이 치료사들의 단독개업을 인정해주고 그 분야에 대해 그들보다 우리가 전문가임을 누구보다 부모들이 더 잘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 놓아주길 바란다. 의학과 약학이 분업될 때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는 말을 기치 삼았듯이 이제 '진료는 의사에게 치료는 치료사에게'라는 말을 기치삼아 분업을 해야 할 때이다. 


오늘의 내가 진행형이듯 현재 나의 선택으로 수많은 변수들이 생길 것이다. 뭐 그래도 좋다. 부끄럽지 않은 나의 삶이 되도록, 나의 가치관에 위배되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응원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생긴다면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듯 행복하게 힘을 얻어 용기내서 뚜벅뚜벅 한 걸음씩 가 볼 생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