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간 이의선]
epi1#2. 지긋지긋한 그 집 epi. 1
우리 가족은 서울 끄트머리 허물어져 가는 주택에 살았다. 녹슨 초록색 대문을 열면 길게 내진 마당 한쪽에 벽돌로 쌓은 화단이 줄지어 있는 집이었다. 지붕은 빗물과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고무밧줄로 천막에 싸여 타이어가 동여매져 있었고 퍼석퍼석한 흙이 깔린 화단에는 상추와 고추가 심겨 있었다. 마당 맨 안쪽에는 장독 같은 것들을 올려두는 한 턱 높은 단이 있었다. 장독 뒤로는 담쟁이넝쿨이 온 벽을 휘감고 있었는데, 그 옆 쪽 모서리에는 크고 둥그런 모양을 한 우물이 있었다. 집 안에 무려 우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울 뿐이다. 아빠는 집에 우물이 있는 것이 위험하다며 무거운 나무판자 같은 것으로 입구를 덮어 두었는데 그 안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쉽다.
한 겨울에 그 집은 온갖 군데에서 드는 웃풍으로 굉장히 추웠다. 낱장으로 된 나무 유리창이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해서 그런지 거실에 앉으면 한기가 들었다. 엄마는 두꺼운 광목천을 넓게 재단해 커튼을 만들어 달고 기름 난로를 켜 차가운 공기를 데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기가 아주 차 이불에서 눈만 내놓은 채로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가 두툼한 옷을 둘러매고 따뜻한 솜버선을 신은채 난로를 켜고 훈기가 돌게 한 다음 나를 불렀다. 기름냄새가 코를 찡하게 만드는 그 난로 위에서 온갖 것들이 구워졌다. 고구마, 감자, 계란, 가래떡, 귤 등을 올려 한쪽 면이 노르스름 해지면 맛이야 어떻든 맛있는 기분이 들었다. 날이 심하게 추워지면 밤새 쫄쫄쫄 물을 틀어놓은 수도꼭지조차 자주 얼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물을 펄펄 끓여 몇 번이고 내가 세수하는 대야에 부어주었다. 그 물에 손을 녹이고 뜨끈한 물을 끼얹어 세수를 시작하면 물이 얼굴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부연 김을 내며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는 것이 수고스럽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아파트에 살면 방 온도랑 다르지 않은 화장실에서 따뜻하게 씻을 수도 있고,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수도가 있다는 사실을 꼬맹이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다들 이렇게 사는 건 줄만 알았다. 그냥 모두 그런 겨울을 보내는 줄만 알았다.
여름은 그 집을 온갖 벌레의 집합소로 만들었다. 바퀴벌레는 사계절 내내 있는 예삿일이고 쥐며느리, 콩벌레, 노린재, 지네 등이 자주 기어 나왔다. 밤에 불을 켜면 이름 모를 날벌레들이 형광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든 벌레 중 아빠는 풀벌레를 좋아했다. 초여름, 날이 어두워지면 여지없이 쌔액쌔액 들리는 풀벌레 소리를 마치 고운 클래식 음악이라도 듣는 듯 음미했다. 마당에서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는 날이면 아빠는 오빠와 나에게 가만히 풀벌레 소리를 들어보라 보챘다.
"쉿! 들려? 이게 풀벌레 소리야. 가만. 맹꽁이 소리도 들리지? 왜, 딸꾹질하는 것 같은 소리 말이야. 그게 맹꽁이야! 아~ 여름이다, 여름."
날이 더워지면 팬티만 입은 아빠가 마당에 나가 돗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 주변에는 우산들이 아빠의 몸을 호위하는 양 펼쳐져 있었다. 아빠의 다부진 몸에는 건선이 울긋불긋하게 피어 있었다. 딱히 간지럽지도, 전염성도 없는 피부병이지만 아빠는 평생 건선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했다. 그래서 해가 쨍쨍한 날에 마당에서 살갗을 태웠다. 아빠의 말로는 피부를 소독하는 것이라고 했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아빠의 일광욕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일주일에 엿새를 새벽녘에 나가 장사하는 아빠가 마당에서 살갗을 태우며 누워있는 것만으로 집이 활기를 띠었기 때문이다. 가게를 안 나가는 일요일에도 아빠는 새벽같이 일어나 마당을 쓸고 물을 뿌려 바닥을 박박 문지르며 청소를 했다. 청소가 다 끝나면 집안을 돌며 식구들을 깨우기 시작하는데 느지막이 일어나면 축축한 물 비린내가 났다.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엉덩이를 씰룩대며 종종걸음을 걸었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서였다. 집에 도착한 나는 덮여있던 변기 뚜껑을 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놀라서 금방이라도 쌀 것 같던 오줌도 들어갔다. 성인 여자의 팔뚝만 한 쥐가 변기통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쭈삣 서는 광경인데 그 당시에 나는 움직일 수도 없이 자리에 얼어붙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화장실 변기통에 엄청나게 큰 쥐가 죽어 있어! 어떡해!!!' 야단법석을 떠는 나를 보고 엄마는 알고 있었다는 듯 깔깔 웃었다. 변기통의 쥐를 본 후로 나는 아직도 변기 뚜껑 열기가 두렵다. 그런 집이었다. 어디선가 불쑥 쥐가 나오고 불을 켜면 사삭-하고 바퀴벌레가 몸을 숨기는 집. 그 후 그 쥐는 누가 어떻게 치웠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선 달갑던 달갑지 않던 모든 것들과 공존해야 했다.
그 집에 대해서라면 나는 종이 한 장이 까맣게 되도록 할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우리 엄마에게는 그저 창피한 나날들이었다. 엄마는 그 시절이 너무 지겨웠다고 얘기한다. 그 집으로 이사 가기 전,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방학동 아파트에서 삼 년간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고작해야 서너 살이어서 기억이 거의 없는데 흐릿하게 기억나는 건 부엌에 서있던 아주아주 마른 엄마의 뒷모습이다. 내가 밤에 잠을 안 잘 때 망태 할아버지가 바깥에 있다며 얼른 자는 척하라던 엄마의 목소리도 떠오른다. 그 아파트로 들어가게 되었던 건 아빠의 조급함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가 지하 단칸방에서 갓난쟁이인 오빠와 나를 키울 때 친할머니가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친할머니의 병을 처음 듣게 된 사람은 둘째 며느리인 우리 엄마였는데 장사를 마치고 늦게 달려온 아빠가 놀라지 않도록 엄마는 단어를 고르며 비보를 전했다. 아빠는 암이라는 어둑한 현실을 부정하듯 목동 이대병원 비상구 계단에서 서있는 채 뒤로 고꾸라졌다고 한다. 그런 할머니의 마지막 염원이 서울에서 힘들게 장사하는 기헌이가 아파트에 사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진 것 하나 없던 나의 부모는 급하게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연고도 없는 방학동에 부랴부랴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결국 아들의 아파트에 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잘 살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가난한 축에 속했던 듯하다. 아파트를 얻느라 빌렸던 돈을 갚자 다시 지하 단칸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에게 마음의 병이 찾아왔다. 그녀는 일주일에 7일 독박 육아를 하며 살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 4시에 나가 저녁 7시가 되어야 돌아오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씻겨달라거나 놀아주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시장이 쉬는 일요일에 남편이 애들과 놀이동산이나 동물원처럼 재미있는 곳을 가 추억을 쌓아주길 바랐지만 그는 새벽같이 나가 친구들과 등산 가기 바빴다. 그녀는 말리지 못했다. 당신이 살림과 육아를 하며 힘든 것보다 그가 매일 마주할 현실이 더 버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단 하루 만이라도 남편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길 바랐던 아내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삶은 어두워졌다. 밥맛이 없어지고 자주 멍해지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세 살배기였던 내가 베란다에서 놀다가 장난감을 밖으로 떨어뜨렸다고 한다. 떨어진 장난감은 하릴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며 엄마는 생각했다. '어? 떨어지네. 떨어지면 무슨 느낌일까?' 그와 동시에 그녀는 몸의 축을 밖으로 기울였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으나 어린 딸이 옷자락을 당기며 '엄마아!' 하고 소리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걸까 자책하며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때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얼굴로 쑥 들어왔다.
엄마는 지금도 자주 그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그때 처음 알았어. 사람이 죽으려고 마음먹고 죽는 게 아니야. 장난감이 밑으로 떨어지는 걸 보는데 순간 엄마도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그냥 드는 거야. 그때 네가 엄마 살린 거야. 네가 '엄마!'하고 안 불렀으면 엄마 정말 떨어졌을 거야. 그 쪼끄만 아기가 엄마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주는데...' 목소리가 떨리며 말끝을 흐리곤 한다. 나는 기억도 안나는 일이지만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엄마의 젊은 날이 왜 그렇게 힘겨웠어야 했는지 원망스럽기도 하다.
방학동은 외할머니가 살던 녹번동과 꽤 먼 곳이었지만 할머니는 그 먼 길을 오가는 수고를 망설이지 않았다. 딸이 근처에 살 때는 오며 가며 먹을 것을 자주 챙겨주곤 했는데 거리가 멀어지니 밥은 잘 챙겨 먹을지 항상 눈에 밟혔다. 외할머니가 큰맘 먹고 방학동에 들르면 엄마는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속이 상했다. 할머니는 좀 더 자주 우리 집에 들러 여러 반찬들을 날랐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본인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했다. 할머니는 살던 집을 내어주고 두 집 떨어진 오래된 빌라 지하방을 얻어 들어가셨다. 그러고는 매일같이 우리 집에 들러 엄마에게 호박 달인 물을 먹였다고 한다. 안 먹겠다고 하는 엄마를 붙들고 '너 이거 먹기 전까지 안 나갈 거야.'라고 말씀하시며 말뚝처럼 앉아계셨다. 그렇게 밤낮으로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셔서 엄마를 붙잡아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앙상한 나뭇가지 같던 막내딸이 혹여나 부러져 버리진 않을까 매일같이 들여다보시고 보살펴주셨다. 그때부터 엄마는 다시 살이 붙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내어 준 그 집이 바로 그 오래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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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기간 이의선
分期間 李宜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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