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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 채집가 Apr 29. 2020

호박목걸이

<책수다>딜큐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1917-1948)

메리 린리 테일러(1889-1982)라는 한 영국 여성이 있었다. 연극배우였던 이 여성은 일본에서 미국인 브루스를 만나 1917년 한국에 왔다. 1923년 인왕산에 '딜큐샤'라는 집을 짓고 1942년까지 살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다. 시아버지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한국에 온 최초의 금광사업가로, 아들과 함께 운산금광을 운영했다. 


메리는 글을 썼다. 글을 쓰는 여성은 중요하다. 1900년대 초만 해도 더욱 그렇다. 메리는 자전적인 기분이나 서술하는 그런 글을 쓰지 않았다. 주변을 세세하게 둘러보고 관찰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 책이 바로 '호박목걸이'이다. 



부유한 영국 여성이 1917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이러한 인상비평을 들어 '오리엔탈리즘'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의견이 조금 다르다. 그저 여행자의 시선으로 조금 너그럽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일기장에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서구적인' 시선까지 고찰하면서 쓰진 못할 것이다. 영국의 여행자는 낯선 이 땅에 도착해 새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한다. 메리의 글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그득하다. 그의 책 제목, 호박목걸이처럼 말이다. 새롭고 신기한 구슬들이 줄줄이 꿰어져 있다. 


우리나라는 나라의 형태도 채 갖추기 전,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에서 귀한 것들을 이미 수탈해갔음을 알 수 있는 말도 있다. "당시는 모든 외국인이 치외법권을 누리며 각자 자국 영사의 권한에 맡겨져 있었다." 브루스 역시 금광을 만들어 투자해 금을 채취해갔다. 운산광산은 20년동안 6천만 달러의 배당금을 벌어주었다고 했다. 

사람들의 손때묻은 물건들도 쉽게 해외로 흘러나갔다. 브루스에게 '박물관'이 있었는데, 여기엔 한국에서 수집한 예술품을 진열해놓았다.  궁중 의복들은 차를 마시거나 포도주를 마실 때 직접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에 브루스 부부를 내내 도와주던 골동품상인 김주사가 나온다. 김주사는 골동품가게를 운영하면서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아들은 라디오 상점에서 일하고 둘째 딸 노라는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김주사의 환갑잔치에 갔다가 양반 김주사의 진심을 듣게 된다. 김주사는 우리나라가 마지막 조공을 바칠 때 청나라 황제가 고종황제에게 선물한 각대를 간직하며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워나는 것은 독립만이 아닙니다. 그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원합니다." 메리는 이 상투와 관례와 관습이 사라진다 해도, 양반이 다 사라져도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은 김주사의 생각을 여전히 가슴 깊이 품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리에게는 물론 2020년의 우리에게도 흥미로운 우리 풍습이 담겨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은 그 개털을 태워 상처에 바른다.

-허리춤에는 빠지는 머리카락이나 수염, 손톱 조각을 모아두는 작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 제주도에서는 일처다부제를 따르며 여자들이 물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해녀들이 배 위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메리는 문득문득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친절하게 옮겨주었다. 

금강산에서 만난 여관 주인인 노인은 "자기가 살아 있는 이유는 딱 하나, 나라의 독립을 보기 위한 것이며, 독립이 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금강산 가는 배에서 만난 대학생은 가이드를 자처하면서 몰래 다가와 묻는다. "당신 한국과 친구에요?. 일본 놈 나쁜 놈." "언젠가 우리가 다시 가져와요. 우리 독립해요." 그의 울대뼈가 꼼짝하지 않았다. 목이 멘 것이리라.

메리가 첫 아들을 낳기 위해 입원한 침대 밑에는 독립선언문이 숨겨졌다. 3.1운동의 시작이 메리의 운명과도 닿아 있었던 것이다. 

 

원산에서는 러시아난민수용소를 맞닥뜨렸다. 거기서 남장 여군 체리를 만났다. 체리는 어느 저녁, 부모님이 살해당한 모습을 목격하고 오빠가 있는 군대로 갔고, 시베리아를 횡당하며 2년동안 볼세비키와 싸웠다. 

부부는 서울에 집 '딜쿠샤'를 지었다. 딜쿠샤는 는 힌디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을 뜻한다. 제단 위에 지은 집이라 무당이 저주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브루스는 병에 걸려 한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  

남편 브루스는 금광을 팔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에 구속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어려움을 겪고 결국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브루스는 한국에 묻히고 싶어했다. 


이방인의 문화가 와닿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메리를 통해 듣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 시절 그녀를 스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꼼꼼하게 적어두어 감사하다. 

기록의 힘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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