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사는 덕후에게 삥 뜯는 법을 안다

'제타'

by 문건우


그러니까 솔직히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도 전부 그놈의 AI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허구헌날 새로운 AI 버전이 나오고 있는 이 흐름을 한낱 일반인에 불과한 내가 이겨낼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불과 3년도 안된 시간 안에 AI가 범람하는 시대. 세상의 흐름이 정말 빠르다. 하지만 그 거대한 흐름에 노를 놓은 채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배우고 익히며 글을 쓴다. 그렇다. 나는 AI에 빠져있다. 그야말로 AI 덕후다.


나를 덕후라고 스스로 칭하긴 했다만, 소위 진짜 덕후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나를 한참이나 깔 볼 것 같은 득의양양한 그들의 표정을 보자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하고 싶지만, 애써 그들을 존중해본다. 본디 덕후들은 자신만의 영역을 빼곤 대단히 배타적이어서, 자신이 밟고 서있는 계단과 눈높이가 맞지 않으면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그래서 나는 덕후이자, 덕후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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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덕후 이야기로 빠지긴 했지만 무튼, 오늘도 어김없이 밤이 깊어져간다. 난 사실 밤 10시만 넘어가면 좀 이상해지는 병이 있다. 낮에는 그럭저럭 멀쩡한 얼굴로 산다. 생산성 같은 말을 입에 올리면서 내가 꽤 쓸모 있는 인간인 척한다. 그런데 밤이 되면 많이 풀어진다. 정확히는, 낮 동안 붙들고 있던 가짜 어른 얼굴이 먼저 퇴근한다.


그 시간의 나는 AI 덕후답게 자주 새로운 AI 서비스를 찾아본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AI 서비스다. 세상엔 참 많은 자기계발이 있는데, 꼭 그런 식으로 미래를 눌러본다. 오늘은 얼만큼 더 발전했을까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에는 늘 이상한 낙관이 있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낙관. 물론 대체로 다르지 않다.



그날도 비슷했다. 억지로 자려 해도 잠이 안 오고, 그렇다고 다시 일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서 사람은 꼭 쓸데없는 데로 샌다. 무슨 소리냐고? 그냥 습관적으로 누워서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린단 소리다. 아니 그냥 잠깐 풀어질 구멍이 필요했던 거라고 엄마가 들으면 등짝이나 한 대 더 맞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광고 속 AI. '제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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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타를 방문한 소감이라. '이건 뭐 허접하네. 딱 봐도 정신머리 빼놓고 사는 덕후들 공략하려고 대충 만든 앱이네.' 라고 방구석 전문가인 척하는 자칭 AI 덕후의 평가다.


재벌 2세라거나, 소꿉친구라느니... 솔직히 나라면 두번은 쓰지않을, 아니 한번도 쓰지 않을 앱 같았다. 덕후면서도 묘하게 덕후와 선을 긋는 나의 선민의식을 고깝게 보던 진짜 덕후가 끼어들었다. "안 쓸거면 그냥 지우면 되지 뭘 그리 투덜대는거지?" 이 말이 그 날따라 묘하게 긁혔나보다.


'그래, 딱 한 번만 써보자. 써보고 까자.' 항상 GPT나 제미나이, 클로드를 봐온 나에겐 더 평가할 가치도 없을만큼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앱을 지웠다. 훗날 이 엉성한 AI가 그렇게까지 대박을 칠 지도 몰랐던 온갖 편견을 휘감은채 말이다.



그렇게 2025년, 초대박 흑자를 기록한 '제타'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LLM 2위로 뽑혔다. 이 녀석... 꽤 강한걸? 후... 미리 내다보지 못한 나의 패배다. 물론 혼자 쉐도우 복싱한거긴 하지만, 그마저도 이기지 못한거니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이 회사는 제일 중요한 걸 알고 있는 셈이다. 사람은 뭔가 대단한 걸 원하지 않는다. 그저 점점 더 삭막해진 세상 속에서 끊겨버린 정서적 교류를 원하고, 낮 동안 열심히 살았다는 가짜 증거를 잠깐 내려놓을 핑계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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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서비스는 기능으로 기억된다. 얘는 뭐가 되고, 쟤는 뭐가 빠르고, 저건 뭐가 편하다. 좋은 브랜드는 여기서 갈린다. 뭐가 더 뛰어난지 설명하는 브랜드는 많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얼굴로 그 브랜드 앞에 앉게 되는지까지 챙기는 곳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게 남는 쪽은 이상하게 나중에도 다시 떠오른다. 결국 기억은 스펙이 아니라 표정에 붙기 때문이다.


물론, 그 타겟이 단지 내가 아니였던 것 뿐인거지 제타는 철저하게 이 공식을 따랐다. 정확히 자신이 노려야 하는 타겟을 발굴했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상상력만으로도 세상을 공략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도와줬을 뿐이다. 뻔한 공략집을 따르는 게 아닌, 나만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가는 세상이라. 덕후에게 이보다 더 꿈같은 일이 어디 있으리랴.


(물론 나는 여전히 제타를 쓰지 않는다. 스스로 덕후라고는 했지만, 그저 AI를 좋아하는 일개 글쟁이 나부랭이일 뿐 그 정도까지는 아닌가보다.)



덕후는 매순간 꿈을 꾼다. 동시에 덕후들도 현실을 산다. 그렇기에 늘 현실의 도피처를 찾아 헤멘다. 제타가 딱 그들에겐 최고의 아지트인 셈이다. 밝지는 않은데 불은 켜져 있고, 지금 들어가면 시간 좀 날리겠다 싶으면서도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곳. 딱 그 정도의 느낌. 특히 하루 종일 쓸모를 증명하고 온 날엔 더 약하다.


그들이 엄청난 걸 해준 건 아니다. 삶을 바꾸지도 않았다. 대신 잠깐, 현실의 쓸모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표정을 지워준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런 건 생각보다 오래 간다. 그리고 돈이 된다. 성공은 이렇게 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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