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보시는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편지 가게 글월

by 문건우


나는 팝업을 잘 안 믿는다. 정확히는, 팝업이 늘 너무 열심인 얼굴을 하고 있어서 조금 경계한다. 입구는 크고, 조명은 밝고, 사람은 많다. 사진을 찍고 나면 손에 남는 건 작은 샘플 하나 거나 딸랑 카드 한 장이 전부다. 뭐 그래 이 정도면 다른 팝업에 비해 나쁘진 않다고 치지만, 대개 거기까지다. 예뻤다. 신기했다. 사람 많았다. 그리고 끝.


그런데 가끔은 끝이 안 나는 날이 있다. 집에 와서도 생각나고, 샤워하다가도 떠오른다. 며칠 뒤 아트박스 앞을 지나다가 괜히 멈춘다. 그럴 때는 아무리 모두까기 인형 기질이 있는 나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아, 내 쪽에 뭐가 묻었구나.


그런 경험을 최근에 가장 세게 남긴 건 '글월'이었다. 아니 최근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벌써 3년 정도 되었나?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최근이라고 느끼는 건 내게 묻은 건 그냥 먼지가 아닌 흰 옷에 튄 김장국물이었나 보다.





편지 가게 글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원래 편지를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쓴 편지도 전 여친의 반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쓴 오글거리던 러브레터였던 것 같다. 누군가는 편지도 잘 쓰지 않는 사람이 무슨 글을 쓰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편지를 자주 쓰는 것과 글을 자주 쓰는 건 좀 다른 영역인거지. 아무래도. 그런데 이런 인간이 편지 가게에 감동할 거라고 누가 상상하겠나.


그날도 딱히 팝업을 보러 간 건 아니었다. 편지를 쓰러 간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친구를 기다리다 너무 심심해서 들린 백화점이었다. 뭐 그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팝업은 예쁜 사진을 찾아 떠도는 인스타 하이에나들의 허세거나 그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나의 발길을 붙잡은 건 '글월'이었다. 나도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구경하던 사람1이었다. 하지만 몇 분 뒤에는 편지지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치 첫 문장을 못 정한 사람처럼 머뭇거리면서, 물건을 고르는 게 아닌 조금 늦게 솔직해진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글월이 잘한 건 화려한 설명이 아니었다. 편지의 소중함을 외치지도 않았다. 아날로그 감성 같은 말을 크게 써붙이지도 않았다. 대단한 슬로건을 던지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내가 평소랑 조금 다르게 굴게 만든다. 조금 느리게 있어도 되는 공기를 만든다. 그들은 편지지가 아닌 편지를 쓰는 장면 자체를 팔았다. 그게 제일 치사하다. 좋은 브랜드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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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팝업은 증거를 남긴다. 이를테면 감성 터지게 만든 인스타 감성의 사진 같은 것이랄까. 그런데 가끔 좋은 팝업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날 내가 산 게 편지지였는지, 봉투였는지, 사실 지금은 잘 기억도 안 난다. 그 브랜드가 남긴 건 종이가 아니었다. 조금 느리게 써도 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물건만 판 게 아니라, 사람이 편지를 쓰는 장면 자체를 운영한 셈이다.


잔상은 늘 이런 식으로 남는다. 몸에 묻지 않고 리듬에 묻는다. 집에 와서 메모장을 켰다가 괜히 문장을 한 번 더 고치게 한다. 누구에게 보내진 않을 것 같은 말을, 그래도 한 번쯤 써보고 싶게 만든다. 그 정도면 브랜드가 꽤 멀리 온 거다.



그럼에도 여전히 팝업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제 한 번쯤은 인정해야겠다. 그곳에 머물던 내 뒷모습을 아직도 떠올리는 나를.


분명 글월은 말하고 있다.

"어딜 보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전 아직 이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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