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까지만 해도 동네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온 대한민국이 그랬다고 해야 하나? 나무마다 핑크빛이 넘쳐나, 평소엔 고개도 안 들고 걷던 사람들까지 하늘을 보고 걸었다. 지하철 문 닫히는 소리에도 인상 쓰던 사람들이, 벚꽃 앞에서는 갑자기 “와...” 같은 원시적인 감탄사를 쓴다.
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참 예뻐보였다. 왜 커플들이 이 맘때만 되면 꽃놀이를 못 가서 안달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난 봄이 오면 감상에 젖어서 잠깐씩 방구석 시인이 되곤 한다. 분명 나만 그런게 아닐거다. 아니, 아니라고 해줘.
근데 엊그제까지 만개했던 벚꽃이 오늘 보니까 하나도 없었다. 무슨 악덕 회사 탈출도 아니고, 인수인계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돌도 활동 마무리 예고는 하는데 벚꽃은 그런 거 없다. 한창 예쁘다가 어느 날 보면 그냥 내 통장에 월급이 스치듯 아니 '잘 놀다갑니다. 먼저 가볼게요^^' 하는 리뷰라도 쓰고 가던가, 이 놈의 벚꽃은 정말 그런 게 없다.
하지만 핑크가 한바탕 휩쓸고 간 세상은 여전히 바뀔 줄을 모른다. 이 계절만 되면 정말 많은 브랜드가 갑자기 핑크색으로 물든다. 로고도 핑크, 배너도 핑크, 패키지도 핑크, 심지어 평소엔 절대 그럴 일 없어 보이던 브랜드까지 잠깐 봄을 연기한다. 근데 희한하게도 다 기억나진 않는다. 분명 다들 열심히 분홍색을 칠했는데, 막상 벚꽃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늘 몇몇 브랜드뿐이다. 왜 그럴까.
벚꽃은 핑크색이 아니다.
벚꽃은 며칠짜리 장면이다.
잠깐 피었다가 금방 사라지고, 그래서 사람을 더 들뜨게 만들고, 괜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게 만드는 짧은 시즌의 공기. 중요한 건 꽃잎의 색이 아닌, 그걸 보던 내 상태다. 그건 누군가의 고단한 퇴근길이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같이 걷던 낭만 넘치는 산책길이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괜히 카페에 들르고 싶었던 내 마음일 수도 있고, 사진 한 장쯤은 남기고 싶은 기억 속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사람이 기억하는 건 벚꽃 자체보다 늘 그 앞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브랜드보다 '봄'하면 스타벅스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다.
스타벅스는 벚꽃을 파는 게 아니라, 출근길이나 산책길에 괜히 손에 하나 들고 싶어지는 봄의 핑계를 판다. 벚꽃 시즌 텀블러든 컵이든, 사실 그게 엄청 대단한 물건이라서 기억나는 건 아니다. 그걸 손에 들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쉽게 상상되니까 기억나는 거다.
약간 이런 거다. 월요일 아침은 원래 별로인데, 연분홍이 살짝 들어간 음료를 하나쯤 들고 있으면 잠깐이나마 좀 핑크 인간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을 할 수 있다. (뭐라 표현할 지 모르는 그 기분을 핑크 인간이라고 하긴 했다만, 아마 무슨 느낌인지 다들 알거다.) 분명 스타벅스는 나한테 판 건 음료 한 잔 인데, 내가 사는 건 그 착각이다. 봄날의 카페는 원래 배를 채우는 장소라기 보단, 계절을 조금 낭비하는 장소니까.
봄은 원래 예쁜 척에 잘 안 속는다. 봄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계절이다. 겉만 핑크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사람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 순간, 조금 들뜨고, 조금 허술해지고, 괜히 뭐 하나 사고 싶어지는 그 타이밍에 정확히 들어와야 한다. 만약 그저 벚꽃의 색을 훔치기만 한다면, 절대 이 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다.
만화 『원피스 』하면 떠오르는 명장면 중에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 장면을 꼽을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통계는 아니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맹독 버섯 스프를 마셨을 때? 아니,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대사만 봐도 어떤 특정 이미지가 그려진다면? 맞다. 당신은 덕후이다. 덕후들은 지금 당장 이 페이지를 떠나주길 바란다.
라고 말하면 내가 제일 먼저 나가야 되기 때문에 그러진 않겠다. 지금도 이 대사를 떠올리며 생각난 장면은... 그래 맞다. 쵸파의 고향, 벚꽃눈이 만개한 드럼섬이다.
이 장면이 나온지 25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아직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그 장면은 벚꽃을 보여준 게 아니라, 벚꽃이 왜 사람을 울릴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꽃잎이 많아서 기억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이 너무 과해서 기억나는 거다. 스타벅스처럼 계절에 강한 브랜드들도 결국 비슷하다. 분홍색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분홍색이 어울릴 만한 내 상태를 먼저 건드린다.
반대로 많은 브랜드들은 여기서 급해진다.
벚꽃 시즌이다? 좋아, 핑크 깔자. 배너 바꾸자. 패키지 바꾸자. 한정판 붙이자.
근데 문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이미 핑크가 너무 많다는 거다. 벚꽃도 핑크고, 쵸파도 핑크고, 스타벅스도 핑크고, 카페 포스터도 핑크고, 팝업 스토어도 핑크다. 이 와중에 또 하나의 핑크가 남으려면 그냥 색깔만으로는 안 되지 않을까?
이건 좀 잔인한 말이지만, 핑크는 누구나 칠할 수 있다. 하지만 장면은 아무나 못 만든다. 너무 짧지만 하나의 강렬한 장면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계절. 결국 봄 시즌에 강한 브랜드는 벚꽃을 닮은 브랜드가 아니라, 내 인생의 한 순간을 벚꽃의 설렘으로 덮을 줄 아는 브랜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새로운 벚꽃이 피어나길 기다렸고, 내년에도 또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