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갑자기 욕실 선반에 낯선 손님을 앉혔을까

시드물

by 문건우


남자가 피부와 화장품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시기라고 한다면, 역설적으로 가장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군대 시절이 아닐까 싶다. 뭇 이 글을 읽는 여자들은 '대체 왜?'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남자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일과가 끝나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없어도 너~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남자들에게 피부 관리란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아닌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것이다.


딱 샤워 시간이 끝난 7시 30분부터 8시 사이. 생활관은 무슨 어디 유명 메이크업샵이라도 된 듯, 큰 얼굴을 다 비추지도 못하는 관물대 거울을 보며 자기 얼굴에 사정없이 싸다구를 날리는 둔탁한 손길들로 가득하다. 이것이 '전투 화장'이다. (사실 이런 단어는 없다.) 이런 전투적인 시간 때문에 남자들도 많은 화장품 브랜드를 접하게 된다. 내가 시드물을 처음 알게 된 것도 딱 이 시기였다.



각 브랜드마다 눈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브랜드는 우드 배경에 초록색 로고가 기억난다. 또 어떤 브랜드는 북극곰이 빨간 목도리를 두른 이미지가 바로 떠오른다. 특정 브랜드 네임을 말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이미지. 시드물도 내 머릿속엔 늘 비슷한 장면을 만들어왔다.


화려한 조명이나 립글로스 광고 같은 윤기는 아니다. 오히려 밤 열 시쯤, 피부가 괜히 뒤집혀서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에 가깝다. 이 화장품은 나랑 안 맞나, 바꿔야 하나, 이거 계속 두면 내일 더 올라오는 거 아니냐 싶은 그 표정. 시드물은 늘 그럴 때마다 딱 생각날 것만 같은 브랜드다. 예쁘고 화려한 브랜드라기보다 약간 촌스럽지만 건강하고 성실한 브랜드, 뭐 그런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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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일을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무지하다."


나는 이걸 단순히 과즙세연이라는 BJ의 호불호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이번 건은 누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시드물이라는 브랜드가 그동안 자기 고객 머릿속에 차곡차곡 깔아 둔 장면과 너무 다른 사람을 갑자기 데려와 마이크를 쥐여준 사건에 가깝다. 「한국인의 밥상」에 화려한 아이돌을 MC로 쓴 셈이랄까?


브랜드는 결국 제품만 파는 게 아니다. 고객이 그 브랜드를 쓸 때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상상하는지까지 판다.


화장대 앞 과한 욕망보다는 욕실 선반 위의 안심. 보기 좋은 패키지보다 덜 자극적인 성분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뷰티보다 내 피부가 오늘 좀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현실적인 소망. 시드물을 쓰는 사람의 머릿속 장면에는 대개 이런 공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시드물은 오랫동안 그 장면을 잘 쌓아온 브랜드였다. 화장품을 파는 척하면서 사실은 조용한 신뢰를 팔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번 모델 선정은 그 신뢰를 한 번에 흔들어버렸다.


물론 이 말은 과즙세연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잘했다와 잘못했다, 선과 악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각자 잘 맞는 무대가 있다. 문제는 시드물과 안 맞았다는 데 있다. 하객룩 잘 입는다고 결혼식 사회까지 다 잘 보는 건 아니지 않나. 누군가에겐 강점인 캐릭터가, 다른 브랜드에 들어오면 갑자기 전체 조도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 이번엔 딱 그랬다.


특히 화장품은 더 민감하다. 패션은 한 번 화제성으로 밀어붙여도 된다. 식음료는 재미로 한 번쯤 찍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화장품은 다르다. 화장품은 루틴이고, 루틴은 생각보다 보수적이다. 게다가 그 루틴을 향유하는 주 고객층이 다름 아닌 여성이다. 그런데 단순히 화제성만 보고, 여성 지지 기반은 약하고 남성 팬덤 비중이 훨씬 큰 인물을 데려온다면... 이건 뭐 낭떠러지에 발을 내딛는 걸 도전이라고 포장하고 있는 셈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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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는 광고 모델을 화면으로만 보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내 화장대, 내 세면대, 내 저녁 루틴 옆에 앉혀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순간에도 내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느냐. 거기서 미간이 찌푸려진다면 끝이다. 화제성은 잠깐이지만, 불편함은 꽤 오래간다. 오히려 시드물은 이걸 누구보다 잘 알았어야 했다.


이 브랜드가 잘해온 건 한 방이 아니었다. 대단한 캠페인도 아니었다. 차근차근 안심되는 장면을 만들어온 시간이었다. 지금도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면, 청년 창업가가 만든 회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홈페이지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는 촌스러움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제품력으로만 승부하겠다는 고집을 가진, 저기 어디 지방의 TV 광고에서 나오는 견실한 기업 사장님의 모습 같은 투박함과 자부심이 담긴 모습도 느껴진다.


그래서 더 아쉽다. 오래 쌓은 이미지는 생각보다 단단하지만, 꼭 자기 손으로 흔들 때 제일 크게 흔들린다. 그리고 흔들려보니 깨달았을 것이다.


고객은 욕실 선반에 낯선 손님 하나를 쉽게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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