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제주 협재 일기 사흘 < 산책 >

첫 한달살이, 2022.4.25일부터 5.27일까지 제주 일기입니다.

by 준환

비가 많이 내리다가 그치면서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갈 때는 해안 일주로를 이용했으나, 돌아오는 시간은 정체가 심해 평화로라 불리는 넓은 고지대 도로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안개가 심하지 않았지만, 한림으로 가는 이 차선 좁은 길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짙어지더니 이내 뿌옇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되어 비상등 켜고 속도를 완전히 줄였다. 연막을 피운 모양으로 너무 짙어 반대편의 차가 십 미터 안으로 왔을 때야 간신히 식별할 정도였다. 반대로 둘은 구름 사이를 지나는 듯 신비로운 풍경과 간간이 드러나는 산간 경치에 감탄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숙소로 왔다.


저녁 먹고 산책을 나섰다. 집은 큰길에서 안쪽으로 들어온 한림항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명리에 있다. 큰길 반대인 내리막을 따라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 드문드문 가로등이 비추었고, 아무도 없는 길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으나 아까와 달리 편안했다.


동네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잘 가꾸어진 옥수수나 양배추밭이 죽 이어졌다. 집 앞 텃밭에 자라고 있을 감자와 상추, 토마토가 떠올랐다. 4월에서 5월은 식물들이 한창 자라는 시기, 한동안 보살피지 못해 잡초와 경쟁에서 스스로 잘 이겨내길 바랐다. 잠시 언덕길을 내려갔다. 드문드문 민가 몇 채와 한쪽 곁에 재활용품 수거함이 놓였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분리배출 하려면 이곳까지 꽤 발품을 팔아야 한다. 주전부리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편의점을 찾았으나 아직 온 만큼 더 가야 해 포기하고 돌아가며 안개와 가로등을 뒤로 한 장 찍었다. 빛 받은 배경은 환하지만 흐렸고, 인물은 어둡고 선명했다. 흡사 일식 같았다.



※ 제주도 각 지역은 나이테 모양의 일주도로와 사이사이 직선도로로 이어졌다. 1132번 일주동서로는 제주와 서귀포를 비롯한 모든 해안 마을 가운데로 지나며 바다가 보인다. 다만 신호가 많고 제주시 가까이 갈수록 정체가 심하다. 그보다 고지대에 1136번 중산간로가 드문드문 작은 마을을 지난다. 인적 없는 곳은 오름과 나무숲이 늘어서 경치가 좋다. 직선도로는 여러 개다. 한라산과 가장 가까운 1100고지로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1139번, 제주시에서 모슬포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1135번 등이 있다. 우리는 1135번 평화로를 가장 많이 이용했다.



자동차박물관 – 카멜리아힐 – 금오름


지난 삼 일 중 가장 좋은 날씨다. 아내 생일이라 아침부터 분주했다. 미역과 들기름, 양파, 액젓, 소금뿐인 재료는 긴 시간 진하게 끓이는 걸로 부족한 맛을 채웠다. 아침 준비가 끝나고 아이가 먹을 햄만 들어간 김밥을 쌌다. 아내와 나는 첫날 간 분식집에서 김밥을 포장할 생각이다. 여행지 점심은 때를 맞추기 어려워 이게 가장 편하다. 일정을 고르다 가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유명한 청보리밭을 보고 싶어 배편을 찾았으나 벌써 며칠간 예약이 모두 끝났다.


첫 목적지는 자동차박물관. 몇 년 전 왔을 때는 일 층에서 자동차만 전시했다. 지금은 개방한 이층에 피아노가 놓여있어 이름도 자동차피아노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수백 년 된 원본 몇 점과 원본을 그대로 본뜬 모조품들 중에서 순금 입힌 황금색 피아노와 로댕이 조각하여 남긴 그랜드 피아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른들은 아름다운 작품에 매료되었으나 정작 아이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야외 전시관에 방목된 사슴을 쫓아다니며 당근 주는데 푹 빠졌다.


오후는 동백나무 수목원에 갔다. 늦가을에서 늦겨울이 절정인 동백꽃은 사월 말엔 거의 볼 수 없었다. 다만 한두 송이가 크고 화려한 빨간 꽃잎을 마지막으로 뽐냈다. 잘 가꾸어진 야외정원과 수국이 가득한 온실을 지났다. 한낮의 강한 햇살을 피해 빽빽한 나무로 덮인 샛길을 따라 걷다 힘들 때는 군데군데 오두막에서 머물렀다. 저 멀리 온 사람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꽃을 기억에 남기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금오름에 올랐다. 야트막한 높이였으나 산허리 둘레길로 들어선 바람에 한참 걸렸다. 인적 없는 수풀을 헤치고 꼭대기에 다다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한라산과 한림항까지 가려짐 없이 시원했다. 오름은 겉모양에 따라 말굽형, 원뿔형, 원형, 복합형으로 나뉜다. 금오름은 원형으로 가운데가 오목하고 화구에 물이 고인 산정화구호 오름이다. 그래서 붙은 작은 백록담이란 별칭대로 화구에는 물이 모여 큰 연못이 되었다. 붉은색 화산 토양이 독특한 비탈을 내려갔다. 짝짓기를 맞은 개구리들이 귀가 떨어지도록 크게 울었고, 녹색 풀과 갈대가 바람 따라 이리저리 누운 모습이 아름다운 호숫가를 닮았다. 잠시 서서 사진으로 남겼으나 눈에 담은 것만 못했다. 식구들을 두고 혼자 올라왔음에도 정상 둘레길을 지나칠 수 없었다. 시원한 바람맞으며 내려왔던 곳 반대편으로 올라가 시작 지점으로 돌아왔다.



둘에게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다. 관심은 보였으나 산길은 올라가기 싫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강요할 수 없는 일. 그래도 쉬운 데를 골라 같이 가야겠다. 제주도 올레길과 오름은 놓치기 너무 아깝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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