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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Aug 25.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8

열네 번째 우리 집


우리 집 이야기가 이제 마지막 집에 이르렀다. 시간이 흐르고 그에 따라 거주 공간이 이렇게 많이 바뀌어 왔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하나하나 따져보니 당연한 듯하기도 하다. 세월의 흐름은 공간의 변화로 측정될지도 모른다는, 인생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이벤트로 측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열네 번째 우리 집은 그동안 살아왔던 전세금에 비해 가장 비싼 만큼 만족도는 높았다. 집주인이 집을 사서 인테리어를 한 후 들어온 첫 세입자였기에 얻게 된 혜택이라고 봐야겠다. 대신 우린 그 인테리어 비용 조로 전세금을 좀 더 올려 준 셈. 집주인이 집을 구입한 비용과 우리의 전세금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우리도 과연 전세를 계속해야 하는가, 무리해서라도 집을 구입해야 하는가. 이건 당시 한 동안 우리 부부가 고민해 온 내용이었다. 집값도 전셋값도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었다.


열네 번째 우리 집은 마침 처갓집과 같은 동이어서 아들이 초등학교를 시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전 집에선 차를 가지고 아들을 처갓집에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했는데 이점에 있어서는 너무 편했던 것. 아들이 초등학교를 시작할 때는 장모님이 데려다줬는데, 아들은 몇 번을 그렇게 케어를 받더니 얼마 지나서는 외할머니가 같이 오는 걸 친구들 보기 창피했는지 할머니를 못 오게 했단다. 귀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하교를 하고 나서 외할머니 댁에서 식사도 해결하고 이모랑 놀 수도 있었으니 아들에게는 최상의 환경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엄마 아빠는 각자의 일에 집중할 수도 있었고.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도 귀여움은 여전했다. 엄마의 바람대로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피아노 치기를 좋아하기도 했고, 아빠랑 나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로 결국엔 자전거 타기를  마스터하기도 했다. 틈 나는 대로 가족 여행이나 산행을 하며 그다지 극적이진 않지만 소소하고 평범하게 일상을 보냈다. 사람 사는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평범함이 아닐까. 나는 가족과의 생활이 즐거웠고 소중했다.


그러나 내 인생의 또 하나의 극적인 변화를 유발하는 사고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허리 부상이었다. 제대로 운동을 한 지가 언제던가. 아마 결혼을 하면서 산도 멀어지게 되었으니 7,8년은 족히 되는 동안 제대로 운동한 기억이 없다. 그동안 몸이 아프지도 않아서였겠지만 어쨌든 사달은 나고야 말았다.

설 연휴 마지막 날 허리가 좀 뻐근했다. 가끔씩 무리하게 운전을 하거나 잘못된 자세로 청소를 하거나 할 때 허리가 삐끗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던 거 같은데 하여간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었다. 운동 부족 같아 걸어보기도 하고 허리부근을 다른 사람 통해 풀어주기도 했었지만 좋아지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다 다음 날 안 좋은 상태로 출근을 했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다 결국엔 급성 통증이 와 버렸다. 계단 난간을 잡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회사 후배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고 119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갔다. 허리가 부러진 거 같은 느낌이었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까지 불러 간신히 통증이 진정되고 나서 집에 어렵게 갔다. 확실히 쉬고 출근을 했어야 하는데 다음날 가벼운 허리 삐끗으로 알고 무리하게 출근하게 되었고 그런 상태로 며칠을 더 출근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통증은 완화되었지만 이상한 것은 전엔 회복되어 일상에 지장이 없었던 것이 이번엔 계속 가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 통증은 회복이 안 되고 만성적으로 계속되었다. 제대로 운동도 못하고 지루하고 지루한 그리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 주변 한의원에서 수시로 침도 맞고 주변의 소개로 도수치료도 받으며 몇 개월에 걸쳐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 생각한 건. 다시 산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하던 짓을 안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는, 엄청 후회를 하며 한탄하던 때다.

내가 결혼을 발표했을 때 나를 아끼던 선배 한 분은 6년간 산에 나오지 말고 가정에 충실할 것을 명했었다. 나도 산으로 밖으로 다니며 살던 삶에서 결혼생활로 전환하면서 이 결혼과 가정생활이 신기하고 재밌었던 게 사실이라 딱히 아쉬울 건 없었다. 산은 점점 멀어졌고 또 어떻게 보면 드디어 산에서 해방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신선하고 포근했던 삶에 빠져 난 내 허리가 내 몸이 약해져 가는 것을 몰랐다. 어쩌면 과거 산에 다니면서 자신했던 건강은 변하지 않고 확보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 대한 결과물은 확실했다. 몸은 내게 명확한 경고를 한 셈. 난 회복되는 대로 다시 산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소홀했던 산악회에 다시 살살 나가기 시작했고 허리 다쳐 헤맸던 해의 이듬해는 암벽등반도 다시 시작했다. 새로 경험한 첫 바위는 두려웠지만 피할 수 없는 과정임을 나는 알았다. 과감히 장비에 투자를 해서 산에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지려 했다. 허리도 웬만큼 견뎌 주었고 나의 산으로의 복귀는 나쁘지 않았다.


한편 회사에서도 많은 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입사 시 부서로 복귀한 이후 업무는 원활했다.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이런저런 문제에 대한 해결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일을 수월하고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기도 했다.  전보다 일들이 훨씬 원활했고 쉬웠다.

그 와중에 나는 팀장이 되었다. 업무가 조금 바뀌었지만 큰 부담은 없었다. 다만 관리자 위치에서의 낯섦을 잘 풀어나가야 했다. 새로운 도전이었고 새로운 재미였다. 나의 생각대로 나의 해법으로 하나하나 일들을 풀어갔다.


회사생활에서도 또 다른 변화가, 또 다른 삶이 꾸역꾸역 이어지고 있었다. 인생이란 사는 게 아니다, 살아지는 거지. 받아들이고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뭘 계획한 것도 아니고 내가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내가 하는 것은 오로지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일 뿐, 내가 뭘 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또 한 편의 삶이 있었으니 대학원이다. 이사를 할 때쯤은 첫 학기를 마칠 무렵이었고 대학원을 참 잘 갔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 방학이 즐거웠고 뿌듯했다. 우연찮게 기회가 되어 후지산도 가고 삶의 범주는 훨씬 넓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뭘 망설이지 말고 기회 될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한 듯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뭘 하는 것’이 조금은 내 인생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악필, 202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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