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내에 처음 도착한 날. 숙소를 가기 위해 오페라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준 파리지앵의 친절에 감사함도 잠시, 곧이어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소매치기를 만났다. 몸을 마구 밀며 탑승하더니 갑자기 디즈니랜드를 어떻게 가는지 물었다. 너무 전형적인 수법인데도 막상 내가 어제 다녀온 곳을 물으니 머리가 하얘졌다. 가방에 지도가 있었는데... 하고 지도를 꺼내려 가방에 손을 넣은 순간! 가방에 있어선 안될 그 것, 남의 손을 잡았다. 소매치기의 손이었다. 당황한 듯 눈을 굴리는 그 아이들은 소매치기들이었다. 아이들을 노려보니 그 아이들은 "쏘리"하고 다음 역에 내렸다. 이거구나, 무서운 파리가. 잘 쳐낸 것 같지만 나에게 생각 못한 큰 일이 닥친 것 같아 그 이후로 잔뜩 긴장이 되었다. 지하철을 빠져나와 숙소를 찾아 헤매는데 길거리엔 왜이리 노숙자가 많은지. 나를 보며 피식피식 웃는 게 여간 무서운게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상태로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비로소 안전지대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하지만 그 안도도 잠시. 힘들게 방문한 한인민박 사장님은 나와 묘하게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오는 길이 진짜 힘들었어요ㅠㅠㅠ"
"이 앞에 계단 때문에?(에게, 고작 그걸로?)"
"아뇨, 계단도 캐리어 때문에 힘들긴 했지만... 그거보단 오는길에 소매치기 당할뻔 했거든요."
"소매치기가 있다고??? 이 동네에???(요즘도??? 그럴리가???)"
"오페라 역에서 당할 뻔 했어요."
"아~~ 거기는 그럴 수 있죠. 난 또 뭐라고. 그래도 요즘은 그런거 없는 줄 알았는데. 조심해요. 마음 조금 추스리고, 진정되면 자리 좀 비워주세요. 청소 해야 되거든요."
너무나 쿨한 사장님에게는 나의 힘든 마음을 공감받기 어려웠다.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나는 마음을 더 굳게 먹고 스스로 추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겪은 일이 그냥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인건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청소 시간이니 자리를 비워야 했다. 짐을 간단하게 정리한 다음 숙소 근처의 스타벅스를 갔다. 파리까지 가서 무슨 스타벅스냐 싶겠지만 그때는 조금이라도 잘 아는 곳으로 가서 마음 편히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런던부터 하루도 조용하지 못했던 나의 다사다난한 여행에 조금 지친 마음이었다. 그리고 많이 외로웠다. 정신이 없어 그런지 스타벅스에서도 다른 사람의 음료를 가져가려는 실수를 한지라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연신 죄송해하는 나에게 직원들이 웃으며 괜찮다고 "아~~~무 문제 없어! 괜찮아!"하고 말해주어 조금 힘이 났다. 조금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청소 시간이 끝나고 숙소 주변의 슈퍼마켓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서 들어가기로 했다. 남은 일정은 점심을 먹고 생각해보기로. 그렇게 슈퍼마켓을 들어갔는데 굉장히 신기한 것이 있었다. 빈 플라스틱 병들이 잔뜩 쌓여있고, 아마도 오렌지 착즙기로 추정되는 물건이 있었다. 오렌지가 와글와글 쌓여있고 뭔가 작동시키면 그 자리에서 오렌지가 껍질이 벗겨져 착즙되는 시스템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내 기준에선 백화점이나 놀이공원에서나 볼 법한 너무 신기한 물건인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라 기웃거리고 있으니 직원이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병을 꺼내고 직접 쥬스를 받아서 계산대로 가져가면 계산을 해준다고 했다. 덕분에 오렌지가 눈 앞에서 벗겨져 착즙되는 걸 구경할 수 있었다. 가격도 저렴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방금 짠 신선한 오렌지 쥬스 치고는 아주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숙소에 가서 한 모금 마셔보니, 유레카! 이건 너무 맛있는 오렌지 쥬스였다. 정말 새콤하면서 달콤하고 진한 오렌지 향이 느껴지는 맛. 이런게 어떻게 동네 슈퍼마켓에 있지??? 정말 놀라웠고 한 건 발견했다 싶어 또 뿌듯했다. 나만 놀랍고 나만 새로워 하는 게 좀 웃기긴 한데, 그래서 더 재밌었다. 시련으로 시작한 파리 여행을 위로해주는 재밌는 에피소드같기도 했다.
참 별 것 아닌 착즙기지만 기분이 좋아진 나는 다시 힘을 내서 하루를 더 재밌게 채워보기로 했다. 혼자면 어떠냐 나는 최대한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가방도 더 제대로 동여매고! 씩씩하게 에펠탑을 구경하러 갔다. 탑 주변에서 빵모자도 하나 구매했다. 7유로 달라는 상인과 흥정하며 3유로에 득템. 파이팅 넘치게 머리에 쓰고 셀카봉을 휘두르며 사진도 찍었다. 환히 웃는 내 뒤에 에펠탑이 빼꼼 보였다. 아 정말로 파리에 왔구나.
파리에서의 시간은 정말 즐거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힘들기도 했다. 정말 오만 일이 다 있었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서지도 않고 몇 정거장을 훨씬 지나버려 힘들게 숙소로 돌아온 일이라던지,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왠 이상한 남자가 말을 계속 걸기도 했다. 한 두마디 하고 지나가면 그냥 말텐데 계속 계속 계속 말을 걸었다. 넌 정말 럭키 페이스를 가지고 있구나 블라블라... 파리에도 '관상이 좋으시네요'가 있는걸까 싶었지만 이 동네 문화를 모르니 저 말이 칭찬인지 조롱인지 장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작은 동양인 여자 혼자 걸어가고 있으니 만만해서 말을 걸었겠거니 싶어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또 어떤 날은 마레 지구가 핫하다고 해서 쇼핑 겸 구경을 갔는데 지하철 역부터 시위를 하는지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고성을 지르고 있어 너무 무섭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거의 하루에 하나 꼴로 새로운 일을 겪었다. 재밌는 건 그런 일들도 적응이 되는지 처음에나 힘들지 나중엔 점점 즐기게 된다는 점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한번 와봐라! 내가 다 쳐 낼테니까!' 하는 마음으로 씩씩하게 다니게 되었다. 시련에 점점 강해졌나 보다.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재밌었던 파리. 파리를 떠나올 때 쯤엔 이 모든 일들을 다 극복한 느낌이어서 다음에 또 오고 싶어졌다.
요즘처럼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 되면 파리가 생각난다. 여행의 설렘과 두려움, 혼란스러웠던 시간들과 모두 극복한 뒤에 뿌듯했던 시간들이 기억난다. 조만간 또 가야지 생각하며 착즙기를 샀다. 그 때의 상큼하고 진한 달콤함이 그리워서. 오늘도 오렌지를 짜며 눈물 나는 파리의 맛을 즐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