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깜장 고무신

1화 출산 도우미

by 캔디쌤

차가운 바람이 쌩하고 부는 새벽 두 시....

갑자기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우리를 깨웠다.

" 빨리 우사로 오너라. 어서...."

7남매의 둘째인 나는 언니, 동생 2명과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엔 이미 마른 수건을 한 움큼씩 안고 후다닥 튀어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 흰뿔이(젖소이름)가 새낄 낳을 모양이네. 야밤엔 수의사도 안 오는데 고마 지금 낳으면 좋겠구먼....'

혼잣말로 걱정을 하시던 아버지.

출산이 임박한 흰뿔이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들으며 저녁을 먹었던 터라 아침까지 버텨주길 은근히 바랐다.

젖소를 키운 지는 몇 해 되었지만 직접 새끼 낳는 걸 본 적은 없었다. 항상 동네 아저씨나 수의사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딱히 아이들이 할 일은 없었다.


우사에 들어서니 옆에 있던 검둥이, 아지 등 열 마리나 되는 다른 소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흰뿔이를 흘깃 쳐다보다가 우리를 보고 음메하고 울었다. 날이 춥기도 했지만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오묘한 경외감에 두려움과 기대감이 우리를 더 비장?하게 만들었다. 고삐에 매여 있었지만 배가 아픈지 다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흰뿔이를 아버지는 등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진정시켰다.

"....다리 묶어서 줄을 줄테니 신호 주면 댕겨래이"

아버지가 흰뿔이의 엉덩이에 손을 쑥 넣으며 하시는 말을 듣자마자 구석에 엉거주춤 서 있던 우리는 냉큼 소 뒤로 가서 섰다.

동생들은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않고 무조건 당겼으나( 난 궁금하기도 하고 언니니까) 맨 앞에서 송아지 얼굴이 갑자기 어미 엉덩이에서 쑥 삐져나오는 광경을 똑바로 보고 말았다. (앞발이 꽁꽁 묶인 채로 머리부터 쏙 삐져 나오는 모습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충격!)

보통 소는 서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아버지가 뒷다리까지 나온 송아지를 덥석 팔로 안아 헌 이불에 눕혀주었고 우린 양수 범벅이 된 송아지를 마른 수건으로 마구 닦았다. 아버진 암놈인 걸 확인하고 싱글벙글, 엄마는 ' 에고 얼마나 아프겠노'하시며 연신 어미 소를 쓰다듬으며 사료와 따뜻한 물을 챙겨 주셨다. 한 생명을 낳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말 안 해도 서로 측은지심로 통했나보다.


자기 새끼를 연신 찾는 흰뿔이를 뒤로한 채 동짓 섣달 차가운 우사바닥에 새끼를 둘 수 없어서 이불에 둘둘 말아 낑대며 사랑방으로 린것을 데리고 왔다.

지금처럼 애완동물을 집안으로 들이는 시대도 아니었는데 송아지는 특별대우를 받아도 될 만큼 귀했고 더군다나 그 날은 너무 추워서 모든 게 용납되었다.


사랑방 윗목에 송아지를 눕히고 다 같이 새벽잠을 다시 자는 우린 얼마나 순수했던가....


아침이 되면 시골 아이들은 보통 6시 정도에 일어나는데 출산 도우미로 일한 새벽은 기상이 더 빨랐다.

밤새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던 송아지가 벌써 일어나 우리를 핥고 심지어 걸어 다니는 게 아닌가.

배도 고팠던 건지 계속 이불을 밟고 우리한테 얼굴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로렌스의 각인 이론처럼 송아지는 우리를 자기 어미라고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듯했다. 배속에서 나올 때 제일 먼저 본 사람과 여기 같은 방에 누워있는 사람이 같으니 당연히 어미라고 생각할 수밖에....


마침 삼다수 크기의 젖병에 우유를 한가득 담아 오신 아버지. 그렇게 사랑방 이불 위에서 송아지의 첫 식사가 시작되었다. 송아지는 더 많이 먹으려고 젖병을 면서 먹는데 그 힘이 장난 아니어서 동생들은 젖먹이기 당번을 히 엄두도 못 냈다. 다 먹고 나서 더 달라고 쫓아올 땐 어리버리하다가 송아지에게 떠받히기 일쑤였고 가끔 열린 창문으로 훌쩍 방으로 뛰어 들어오면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보통 아지를 팔기 전 한달 가량 집에서 키우는데 비싼 몸이라 모두가 애지중지으며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것과 호작질도 허용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늘 강아지처럼 대문 앞까지 짧은 꼬리를 흔들며 촐랑촐랑 뛰어와 반기던 어미보다 우리를 더 좋아했던 귀여운 녀석!


소 장수가 경운기 뒤에 송아지를 싣고 떠날 때 송아지도 울고 어미 소도 울고 우사 뒤에서 우리도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송아지가 덮던 헌 이불과 덩그러니 남아있는 젖병을 만지며 또 울었다.


멀어지는 경운기를 오래 바라보며 서 계시던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 아버지 그리고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는, 이름도 잊어버린 송아지의 눈망울이 기억의 저 편에서 오늘따라 눈에 선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