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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Nov 14. 2024

아무도 연구 안 할 것 같은 언어현상

하지만 재밌죠?

나는 좀 엉뚱한 면이 있어왔다. 이 엉뚱함이란걸 굳이 말하자면 메이저의 방법론으로 마이너한 현상을 해석하는 습관에 가깝다. 한 예로 형태론 강의를 듣다가 문득 욕을 만드는 한국어 접두사 '개-'의 분포가 굉장히 특이하고 생산성이 높아 보인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개-'가 나타나는 환경이 일단 표면상으론 일관적이지 않으며 모욕에 쓰이는 비슷한 형태소와 행동 및 생산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쉬는시간에 즉석으로 몇몇 예를 만들어서 욕 접두사를 배열해보는 문장을 만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테스트해봤다. 예문으로 여기 직접 적기엔 너무 강한 예시들이긴 했지만...어쨌거나 흥미로운 일관성이 관찰되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지도교수님께 혹시 '개-'의 분포를 조사하는 아이디어에 대해 여쭤봤다. 그랬더니 흥미롭고 언어학적으로 의미있으나 꼭 해외 저널에 투고하라는 아주 웃프고 실용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혹시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서 대략만 설명하자면 명사 앞에 붙였을 때 욕을 만들 수 있는 접사들, 예를들면 '개-', '창-'같은 형태소들을 연속으로 배열할 때 일종의 위계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생성문법 (촘스키언 언어학) 전통에서는 언어능력 (linguistic competence)에 집중하느라 정형적인 문장만 다룬다는 비판을 왕왕 접하곤 한다. 검증하는 데이터가 지나치게 정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잘 살펴보면 MIT의 Miyagawa 선생님 등 생각보다 재미있는 현상을 같은 전통 위에서 연구하는 분들도 많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냐하면 최소주의(Minimalist Program)로 대표되는 생성문법은 결국 언어에 대한 (자연)과학적 접근이기 때문에 현상이 있다면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설명해 볼 수 있다. 다만 학문 성립 초기 학자들은 이론적 틀의 기본인 언어능력에 집중했고 이것이 분야의 기반을 이루었을 뿐이다. (여전히 생성문법 연구의 중심은 여기에 있긴 하다.)


이러한 정신(?) 아래 좀 특이하다 싶은 현상이 보이면 모아놓곤 하는데 그런 현상을 몇가지만 소개해 볼까 한다. 이론적인 의미는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고 아예 관찰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1. 내용상 기여는 없으나 수용성과 어감을 개선해주는 요소


학부때 지금은 은퇴하셨을 노교수님과 한영, 영한번역을 공부할 때였다. 당시 교수님의 수업 스타일은 이론적이기보다는 실무에 가까웠다. 번역을 실제로 수행할 때 저지르기 쉬운 오류나 사례 바탕의 과제, 피드백이 주를 이뤘다. 그 중 교수님이 설명하는 내용 중에 일명 '감초 워드' 라는 것이 있었다. 내용이나 문법성 자체에는 기여를 하지 않지만 번역물이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말을 칭하는 단어였다. 예를 들면 '김상무 상무가 회계를 담당한다' 보다 '김상무 상무가 회계 전반을 담당한다'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거나, '인기에 호소' 보다 '인기에 대한 호소'가 더 자연스럽다 평가받곤 하는 현상을 말한다. 비슷하게 앞에서 사용한 '왠지 모르게'를 '왠지'라고 사용했을 때와도 수용성에서 차이가 날 수 있을 것이다.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겠지만 이 관찰엔 여러 문제가 있다. 우선 어떤 번역 결과물이 더 '자연'스러운지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업계에서 축적된 코퍼스 데이터? 혹은 실험 기반의 데이터? 이처럼 일단 탐구의 기반이 될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그래도 사용 가능한 방법은 '이 논문에서는 이런 기준을 쓰겠다~'라는 나름의 조작적 정의를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해당 개념 아래 모이는 단어들이 모두 같은 이유에서 수용성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꽤', '좀', '전반', '대한' 등이 이 논의에 등장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모두 같은, 최소한 비슷한 이유로 작동하는가? 마지막으로 번역 결과물의 수용성이 어떤 층위에서 달라지는지도 어려운 문제다. 음운 음성적 이유로 수용성이 달라질수도, 어쩌면 언어 외적 세계 지식이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어학적인 분포 연구는 난항을 겪을 가능성도 높다.


그래도 이 관찰이 의미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해당 요소들이 업계에서 통용된다는 것이다. 모든 통번역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지 그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실용적, 작업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현상으로 삼아 이론적 설명을 적용해 보는 것은 그 가치가 있어 보인다. 우선 연구가 덜 되었다는 점 만으로도 연구 가치는 올라간다. 


2. 한국어 주체높임 '-시-'가 정말로 주체높임인가?


한국어 높임 형태로 선어말어미 -시-는 주로 문장의 주어를 높인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교장실에 가셨다'와 같이 문장의 주어인 선생님을 높이기 위해 '갔다' 대신 '가시었다->가셨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한국어 화자를 보면 선어말어미 '-시-'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유명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는 물론이고 특히나 서비스 현장에서 주어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심지어 그 주어가 발화자 자신이어도, '-시-'가 두 번 세 번 들어가도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이러한 현상이 무엇을 암시할까?


언어 사용의 규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국어 문법을 적절히 파악하지 못하고 오용한 결과이다. 흔히 말하는 국어파괴 혹은 한글파괴에 해당하는 현상일텐데, 그렇게 넘기기에는 '-시-'의 사용이 너무나 광범위하다. '쫄면이 조금 매우세요' 라던가 '이 서류를 떼시려면 저희가 신원을 확인해드려야 하는데 저희 시스템에 신원이 뜨시지를 않거든요?' 같은 문장이 사용될 때, 이를 모조리 틀렸다고 하는 것 보다는 '-시-'의 정체성을 기존과 다르게 살펴보는 것도 좋은 생각 같다. 


본격적으로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시-'가 담화 상황에서 수용자(addressee) 높임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Speas & Tenny (2003)이후 여러 생성문법가들은 표면적, 명제적 문장 위에 Speech-Act Phrase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다시 1970년대의 연구에 기반한다.) 물론 Miyagawa 등은 이를 다른 용어와 다른 모형을 통해 설명하기도 하지만 기본적 문장 구조 그 위에 청자와 화자를 위한 구조적 공간이 있다는 아이디어는 동일하다. 만약 '-시-'가 청자높임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현상을 그대로 분석해 분포를 살펴본다면 담화 상황에서 주체높임 이외의 지위를 이론적으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주체높임으로 사용되어야만 하는 '-시-'와 청자높임으로 사용되는 '-시-'는 다를까?


3. '다르다'와 '틀리다'


흔히 '다른것은 틀린것이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자는 것은 일종의 언어 순화 정책이나 사회 운동의 성격을 보이곤 한다. 이 둘은 단지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현상일 뿐 아니라 실제로 다른 어휘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냥 건조하게 다른 어휘이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적겠지만 내가 궁금한건 2의 '-시-'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이다. '틀리다'를 'wrong'이 아니라 'different'의 의미로 사용하는 화자가 상당히 많다. 만약 이런 화자만 연구 대상으로 모아놓고 이들의 idiolect(개인 방언)를 연구해보면 혹시 이미 'different'의 의미를 획득해버린게 아닐까? 언어 기호와 의미는 기본적으로 자의적이다. 한 언어 전체의 분포, 계열에서 현 상태와 같아진 역사적, 체계적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어떤 형태소가 하필 그 의미와 연결되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예를들어 '사과'가 '그 과일'을 지칭해야만 하는 논리적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비슷한 원리를 통해 혹시 '틀리다'가 이미 너무 광범위하게, 길게 'different'의 의미로 사용되어버린 나머지 진짜 'different'를 나타내는 다른 어휘 요소가 되어버린게 아닐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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