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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Nov 22. 2024

파인만의 꽃

과학과 가치에 대한 오해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에겐 예술가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가끔 나로선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를 보이곤 한다. 그 친구는 꽃을 들고서 "봐! 아름답지 않아?"라고 말한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그리고는 "난 예술가로서 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볼 수 있지, 하지만 너같은 과학자는 꽃을 이리저리 따분하게 분해해버려" 라는데, 내 생각에 이 친구는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우선, 그가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나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뭐 비록 미학적으로 충분히 정교하진 않더라도 말이다...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나는 이 예술가 친구가 볼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가령 꽃을 구성하는 세포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작용을 상상할 수 있고 여기엔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서 파인만은 과학자들의 분석적 방법이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여타 미학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인식에 반박하고 있다. 파인만의 예술가 친구는 과학적, 분석적 방법이 동원되면 꽃이라는 자연물,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분해되어 따분하게(dull) 변해버린다 지적하고 있는데, 이런 불만은 상당히 흔해서 파인만의 일화에만 국한되진 않는다.


다만 나는 이런 인식이 일부분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기제에 대한 분석적인 접근법이 직관적인 아름다움과 공존하지 못할 이유를 딱히 알 수 없다. 오히려 꽃의 생물학적, 화학적 특성을 알면 꽃의 직관적 아름다움이나 여타 미적인 가치에 더해 자연의 질서에 대한 신비감, 인간 인식의 수행을 통한 정신적 기쁨의 지평이 추가적으로 열릴 수 있지 않을까?


과일의 당도, 제빵을 연구한다고 무화과 케이크가 맛없어질까?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로 유명세를 떨친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도 비슷한 비판 및 불만을 잔뜩 상대해야 했던 사람 중 하나다. 도킨스는 이기적 복제자 이론을 통해 인간을 비롯한 생물은 유전체(자)의 운반 기계라는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유기체는 유전체가 성공적으로, 최대한 많이 복제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며 인간도 거기에서 빠질 수 없다. 이는 유기체의 정체성이란 유전체의 독재 아래에 있으며 생물 진화의 주인공은 이들 복제자라는 주장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인간 주체의 존엄성이나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느낌을 주어 많은 반감을 샀다. 인간의 자율적 판단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모두 말살한다는 비판, 그리고 제목의 '이기'가 인간의 본질이며 협동이나 사랑 등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비판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 맥락에서 이기성(selfishness)은 어디까지나 유전체의 입장에서 정의된 개념으로 자신의 복사본을 많이 남기려는 패턴 및 성향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상에서의 (지나친) 이기적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이타적 행동, 도덕을 모두 해체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도킨스 특유의 독설에 가까운 단어 선택 및 화법이 빌미를 주었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로봇이나 기계적 매커니즘에 직설적으로 비유하여 반감을 산 것이다. 다만 이는 글쓰기나 설득 전략의 차원에서 문제가 될 뿐이다. 유전체가 자신의 복사본을 많이 남기려 한다는 사실 자체에 인간적 가치를 없애버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게다가 도킨스는 사실 인간성에 대하여 거의 인간찬가에 가까운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도킨스의 책에서 인간은 이성과 함께 문화 복제자인 모방자(밈, meme)를 가진 존재로 상정된다. 이는 '인간적' 현상으로 인식되는 희생, 고뇌, 자기애, 종교성, 문화현상 등을 포괄할 수 있는 지점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체의 이같은 이기성에 당연히 영향을 받지만 거기에 반역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분석적 설명에 대한 반감은 언어학에서도 발견된다. 정상과학을 추구하는 생성문법, 특히 최소주의(Minimalist Program)는 인간의 언어 양상을 크게 둘로 나눈다.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할 수 있는 언어 능력(Competence)과 실제 사용되는 언어를 말하는 언어 사용(Performance)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생성문법의 주된 관심사는 전자의 언어 능력으로 인간의 내재적 문법, 생물 종으로서 고유한 인지체계를 규명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생성문법 언어학은 개별 언어의 특정한 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나 그것 자체를 궁극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각 언어의 여러 데이터를 근거로 삼아 표면 뒤에 흐르는 공통의 원리를 규명하려 한다. 그래서 생성문법적 연구는 때때로 언어 사용상의 여러 현상을 무시하며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듣는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과학으로서 생성문법이 가지는 관심 영역이 언어 능력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경향일 뿐, 딱히 개별적 언어 현상이 가치없다거나 언어 사용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으로 오며 생성문법 내부에서도 통사-담화 인터페이스 등의 분야에서 현상적 설명 분야를 점점 더 넓혀가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분석이 제시될 때 이에 대해 해체적, 환원적이라는 비판이 이는 것은 꽤나 보편적이다. 이런 비판은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지나친 과학주의로 인간의 모든 면을 삼키려는 독단성이 인류 역사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 탐구 자체가 인간적 가치나 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파인만의 일화처럼 무언가에 대한 이해와 탐구는 오히려 그 대상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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