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과 가르침 역시 한 가지의 의사소통 수단이다
배움의 자세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도 항상 공부하고 배운다.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도 없이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수백 편의 논문을 살피고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학업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 대부분이 그렇다. 충고하고 조언하며 가르쳐준다. 지난 주말에 만난 그 친구도 당신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 테다. 사람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교과서가 될 수도 있고, 자연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가르침은 받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하다. 배울 준비가 된 사람만이, 배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이는 곧, 가르침과 배움이 공존해야 쌍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르침이 없는 배움은 존재할 수 없고,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의미가 없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의미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가르침에 노출된 가운데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든 배울 수 있다. "7살짜리 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말까지 있는데, 우리 사회 속에는 얼마나 많은 가르침이 있겠는가. 그러니 배움의 자세만 취한다면 뭐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침의 수준
배움에는 자세가 중요하지만, 가르침에는 수준이 중요하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대학 수준의 수학을 가르쳐준다면, 아이의 배우려는 자세가 아무리 뛰어나도 의미 없는 일이 돼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각 나이 때에 맞는 평균 수준을 고려한 과정대로 받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대학교 1학년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교육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의 가르침도 그 수준이 중요하다. 가르침의 수준은 높고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수준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수준을 의미한다. 면허도 따지 않은 사람에게 자동차 기능에 대해 전문용어를 써가며 설명한다면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듣는 사람의 수준에 맞게 쉽게 잘 설명하는 것이 훌륭한 가르침인 것이다. 이처럼 가르침의 수준은 곧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의미다. 자신이 잘 안다고 본인 수준에 맞춰 상대방에게 설명하는 것은 아는 척이 된다. 정확히는 아는 것을 티 내는 것, 젠체한 것이다. 즉, 배우려는 사람에게 배려 없는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는 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같은 문제를 설명해도 어렵게 설명하는 교사가 있는 반면,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교사가 있다. 쉽게 가르치는 교사 덕분에 해당 과목에 관심이 생기고, 꿈이 생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상에는 수준 높은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는 있지만, 아이의 수준에 맞추지 못하는 교사는 없다. 그러나 이는 서로 바뀌어야 한다. 수준 높은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는 없다. 아이의 수준에 맞춰 주는 교사만 있다면 말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설명이 쉽고 짧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설명이 어렵고 길다. 한 가지 예시로, 과제 발표를 위해 PPT 작업을 할 때 더 많이 공부하고 외운 학생은 그 PPT가 간단하고 별거 없어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덜 공부한 학생의 PPT는 글자 수가 더 많은 법이다.
배움에는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에는 배움이 있어야 한다. 배움은 특히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고, 가르침은 수준의 배려가 중요하다. 배운 것을 장황하게 티 내며 가르치는 것은 아는 체가 되지만, 배운 것을 배려하며 보다 쉽게 가르치는 것은 가르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