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비롯되는 온기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클레어 키건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로 우리나라에서 12월 11일에 개봉했다. 원작 소설가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로 현재까지 단 4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모두 단편소설 혹은 중단편소설이다. 간결한 문체로 인간의 깊은 내면과 갈등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려나가는 것이 그녀의 글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영화는 1985년 아일랜드의 남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주인공 빌 펄롱이 가톨릭 사회의 추악한 이중성을 목격하게 되고, 자신의 현실적 삶과 도덕적 선택의 과정에 있어서의 내면의 갈등과 실존적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다.
저는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우리 마음속에 잠겨있는 것을 어떻게 감당하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여성혐오나 가톨릭 아일랜드,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 역할 또는 보편적인 것에 대해 의도적으로 글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소녀와 여성이 이러한 기관에서 수감되고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전혀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과 가슴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이것이 필요하거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요
Claire keegan
2022 Buker prizes intervew
작품에서 드러나는 가톨릭 사회의 이중적 면모는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가톨릭 교회의 막달레나 세탁소를 중심 배경으로 한다. 1922년 아일랜드에는 일명 '막달레나 세탁소'라고 불리는 가톨릭 수녀회가 있었다. 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지은 사회시설로 이름처럼 세탁소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과거 세탁기가 발명되기 전 세탁물을 위탁받아 처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일종의 외주업체인 것이다. 이러한 수녀회에서는 주로 미혼모, 성폭행 피해자, 고아, 또는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여겨진 여성들을 수용했다.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여성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제 노동과 학대의 장소로 변모했다.
심지어는 미혼모의 아이들을 돈을 받고 입양을 보내기도 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즉, 보호와 예수의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온갖 폭력과 인권유린을 일삼은 것이다.
주인공 빌 펄롱은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석탄판매 업체를 운영하며 석탄배달을 다니며 다섯 명의 딸과 부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는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한다. 아일랜드의 가톨릭 근본주의 문화는 미혼모와 사생아의 존재를 죄악시하기에 이러한 보수적 문화에서 주인공 빌 펄롱과 그의 어머니는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품어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빌 펄롱의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집의 주인인 윌슨 부인이었다. 윌슨 부인은 빌 펄롱에게게 글도 가르치고 크리스마스 선물도 챙겨주며 사랑과 연민으로 그들을 도왔다.
이렇게 과거 유년시절의 가족도 아닌 낯선 타인으로부터의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을 받으며 살아온 그가 어느날과 같이 석탄배달을 하던 중 그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를 운영하는 수녀의 수녀원인 막달레나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다. 이 막달레나 수녀원은 작은 소도시에 대소사를 관장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장소이다. 그렇기에 수녀원장인 메리의 권위와 그가 행사하는 권력은 굉장했기에 누구도 쉽게 그 권위와 권력에 도전할 수 없었다. 이러한 권력과 폭력의 공간에서 가톨릭 사회의 실상과 현실이 빌 펄롱의 눈 앞에 그대로 펼쳐지게 된다.
그 곳에서 어린 아이들은 공장 부품처럼 끊임없이 일하고 있었고, 한 아이는 이 곳에서 제발 꺼내달라면서 애원을 하기도 한다. 빌 펄롱은 수녀원을 나와 집에 가서 수녀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빌 펄롱은 영화 속에서 항상 시선을 아래로 유지하며 인물들과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 아내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빌 펄롱은 처음엔 등을 돌리고 이야기하다가 뒤를 돌아 아내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화한다.
즉, 처음으로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것이다.
빌 펄롱은 그 수녀원에 있던 아이들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들과 겹쳐보여 마치 자신의 딸들의 일인 것처럼 이입하고 어떻게 그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일은 우리 애들 일이 아니니 신경쓰지 말자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해서 우리는 쉽게 아내를 매정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모두가 쉽게 자신의 현실적 삶과 안온을 포기하고 남을 위한 선택이 옳은 것이라고 강요될 수 없고, 누구나 그런 선택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그녀를 비난할 순 없다.
영화에서 빌 펄롱은 매일같이 석탄가루가 묻은 손을 솔로 미친듯이 닦아낸다. 어느 날은 너무 세게 닦아 피가 날 정도로 닦는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그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들, 그리고 쉽게 나서서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받아온 도움의 손길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심리적 고통과 답답함을 닦아내는 것 같다.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빌 펄롱은 또 한번 수녀원에 방문했을 때, 임신한 소녀를 데리고 수녀원에서 데리고 자신의 집에 데려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그 아이를 결국 구해 낸 빌 펄롱에 대해 누군가는
영웅적인 인물로 해석할 수 있고, 누군가는 현실을 모르고 오히려 가정을 파괴하는 자기파괴적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택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모두 겉으로 드러내는 삶, 숨기는 삶, 그리고 조용히 살아가는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 앞에서 보여지는 것에 더 관심이 많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과 가슴속에 있는 것에 더 관심이 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숨김과 드러냄의 행위에 어떤 방식으로든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퍼롱(Furlong)이 앞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간 사람이라는 점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CBC Radio One’s Writers & Company on April 24, 2022
우리는 늘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보고싶은 것들만 보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미는 사소한 손길들 혹은 관심들이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 않을 수 있다.
사소해 보이는 노력들이 하나 둘 모여 나비효과처럼 하나의 거대한 날개짓을 펼 때 그 힘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른다.
늘 가던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