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돌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하지 말라
서울에서 태어난 무거운 몸이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두르지 마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떠지 않는 땅속의 벌레 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 이여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봄밤"이라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 <푸른 강은 흘러라> 강미자 감독의 두 번째 장편작이며, 2025 13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
뉴비전상을 수상했다.
또한 영화는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콘텐츠진흥원의 ‘제주다양성영화 제작지원 공모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해당 사업은 순 제작비 10억 원 미만의 제주 다양성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기획 개발, 제작, 후반작업 등의 단계적 지원을 통해 참신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발굴하며 제주 영화의 창·제작 환경을 조성하고, 제주 영화인을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진흥원에 의하면 최근 ‘제주다양성영화 제작 지원 공모사업’에 지원받은 작품들은 국내 개봉은 물론이고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수상하며 제주다양성영화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출처 : 제주인뉴스(http://www.jejuinnews.co.kr)
'다양성영화'사업은 제주뿐 아니라 경기도, 서울 (성동구), 대구 등 다양한 지자체에서 지원하고 있는 사업이다. 이러한 지원사업은 특정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영화가 제작되기에 지역 활성화와 지역 기반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의의가 있으며
주류 상업영화가 다루지 않는 이야기들을 자본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형성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영화에는 배경음악이 등장하지 않는다. 온전히 두 주인공의 육성과 몸짓 그리고 그들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다. 아 영화 끝자락에 흘러나오는 김민기의 <나비> 뿐이다.
원작 소설은 30페이지 남짓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원작에서는 그들의 만남이 12년간 지속되지만 영화는 그들의 삶의 여정을 시간의 흐름이 아닌 그들의 관계의 높은 감정적 밀도를 중심으로 압축적으로 그려나간다.
주인공인 영경은 20년간 교직생활을 하던 중,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된다. 남편은 이혼 후 곧바로 재혼을 했다. 양육권을 얻었지만 몰래 이민을 준비한 전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이민을 가버렸다. 그 이후 영경은 점점 술에 의존하게 되었고 술 없이는 잠도, 일도, 생활도 할 수 없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그녀를 만나게 된 수환은 스무 살에 쇳일을 시작했다. 10년 넘게 선반, 절단, 용접, 제관 등 쇠 다루는 모든 기술을 익혔다. 친구와 동업을 하며 작은 규모의 철공소를 차려 공업사 수준으로 키워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러던 중 거래처의 횡포로 갑자기 판로가 막히면서 결국 부도를 맞았다. 위장이혼을 제안한 아내는 이혼자 마자 명의 변경된 집과 재산을 전부 팔고 잠적해 버렸다. 그렇게 그는 서른아홉,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단순영업직과 택배, 대리운전 등 하루하루 삶을 연명해 갔다. 설상가상 그는 류머티즘에 걸리게 되고 그 병은
걷잡을 수 없이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이렇게 점점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두 영혼이 만나게 된다.
수환은 신랑의 친구, 영경은 신부의 친구. 그렇게 둘은 친구의 재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결혼식 이후 모두가 검은색 옷을 입고 술만 마시는 기묘한 뒤풀이에서 모두가 술에 취해 쓰러지고
영경과 수환 단 둘이 남게 된다.
그렇게 그 둘은 그날을 기점으로 단 둘이 술을 자주 마셨다. 영경이 늘 그렇듯 술에 취하면 수환은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그녀를 따뜻하게 업고 집에 데려다 주기를 반복한다.
왜인지 가련해 보이는 수환의 등에 업힌 영경은 김수영의 <봄밤>을 연신 외워댄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돌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하지 말라
서울에서 태어난 무거운 몸이
오오 봄이여
무엇이 그토록 그녀의 마음을 서둘게 했을까?
나는 이 시를 외우는 영경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만남 때까지는 둘이 말없이 술만 마시다가 세 번째 만남 때 각자 본인의 삶의 경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며 둘은 알 수 없는 동질감과 무형의 연결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술을 마시고, 영경은 술에 취하고, 수환은 술에 흠뻑 취한 영경을 둘러업어 데려다 주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암전' 또한 반복된다.
이때 암전은 마치 시의 연 구분과 같은 기능을 하는 듯했다.
암전이 반복될 때마다 시적 여운이 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살 길은 없어도 죽을 길은 있지"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그들은 대체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영경은 수환에게 본인의 아파트로 들어와 같이 살자고 제안한다.
이후 둘은 함께 지내게 되고, 수환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영경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둘은 요양원에 함께 들어가게 된다. 영경은 병원 내에서 술을 마실 수 없어 자주 외출증을 끊고 나가 술에 흠뻑 취해 요양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하루 이틀이었던 외출이 점점 길어지고, 어쩔 때에는 1주일 동안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수환은 그녀가 떠날 때마다 그 외출이 영경과의 마지막이 될까 두려워한다.
영경은 매번 외출 후 술에 절어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무기력한 걸음, 흔들리는 몸. 수환은 늘 같은 자리에서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맞이한다.
어느 날 영경이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걸어오자, 수환은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몸을 뉘인 채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를 향해 기어간다.
더 이상 그녀를 등에 업을 수 없는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끝내 놓지 않으려는 듯
처절하게 그녀를 감싼다.
영화 내내 영경은 분홍빛이나 붉은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등장한다. 그
러나 마지막 외출 장면에서 그녀의 옷은 짙은 갈색으로 바뀐다.
마치 흙처럼, 태초의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며, 이별의 순간이 가까워졌음을 예감하게 만든다.
그렇게 떠난 영경은 술을 마시다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후 요양원에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 수환은 그 방에 없었고, 남은 것은 그녀뿐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길, 봄, 술, 사랑, 절망, 연대
위의 단어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서로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서로의 삶에 파고들어 타인을 이리저리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저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어찌 보면 어떤 이들에겐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랑의 형태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영경이 목련나무 앞에서 오열하는 씬은 가슴이 너무 아렸다
봄의 생명력으로 피어나고 있는 목련 봉오리 앞에 서서 울부짖는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언젠가 그들의 길 끝에도 환한 봄이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