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느낌 처음이다. 내 아들처럼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닌데 부러움이 조금씩 내 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 아이의 살뜰한 가족 챙김이 눈에 보였다.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서 두 동생 식사를 챙기고 행동을 간섭했다. 옥신각신하며 여동생을 시시콜콜 가르치는 모습이 신기했다. 함께 도서관에 가자며 설득하다가 작은 다툼이 있는 것도 예뻐 보였다. 서울로 가는 오빠는 여동생의 게을러 보이는 방학생활 습관을 고쳐주고 싶었나 보다. 내 아들 친한 친구인 진지한 이 아이가 점점 좋아졌다. 맏이로서 심사숙고한 그 아이 모습을 내 아들이 좀 닮아갔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두 번째는 교회 식당에서 요리하는 내게 커피를 건네 준 때였다. 커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지 심부름 다녀오면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서 부엌까지 전달해 주었다. 따뜻한 아이 심성이 전해져서 기분 좋았다. 매번 든든하다며 자랑하는 그의 엄마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공장 일로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그 아이는 동생들과 생일 선물을 하고 어버이날에는 컵에 이름을 새겨 고마움을 표현했단다. 그의 엄마 핸드폰 프로필 사진을 통해 자식들의 유난함은 이미 알고 있던 터다.
세 번째는 청년들 돕는 모임 중에 보이는 그의 리더십이었다. 기타를 치며 모임을 인도하고 깨달은 바를 깊이 있게 나누는 모습이 감동되었다. 스물세 살 그 아이는 부끄러움이 많으면서도 씩씩해져 가는 중이었다. 새로운 진로를 위해 다시 공부하고 신입생이 되어 서울로 올라가는 아이를 위해 진심으로 응원했다.
부러움은 그 아이의 성품과 차분함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그 아이의 다른 모습들을 보지 못해서 겉모습만 보고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사회성 좋고 활달한 내 아들들에게 많은 친구들 있어도 다른 아이들을 크게 부러워해 본 적 별로 없다. 부족하고 실수하고 때로는 느려도, 그저 감사함으로 아이들을 만족하고 사랑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나 보다.
자녀들이 성인으로 성장해 가면서 부모로서 욕심이 나는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몸무게와 분유의 양까지도 다른 집과 비교하며 부러워한다. 뒤집기와 배밀이, 일어서서 첫발을 떼는 순간까지도 비교의 순간이 된다.
유치원에 입학하면, 엄마들은 아이 키와 언어 구사력, 손 조작 능력까지도 비교하면서 속상해하거나 반대로 뿌듯함을 누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관심과 교우관계, 적극성, 사회성에도 조바심을 낸다. 중고등학교 기간에는 국영수 성적과 생활습관, 부모를 향한 태도까지도 부러움과 속상함이 마음에서 널 뛴다. 특히 대학 입학 수능의 결과에 따라서 자괴감과 자부심은 극과 극을 달리기도 한다.
세 자녀를 키우는 동안 부러움을 받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세월이 제법 길었다. 매 번 스스로 주의하려 했던 것은 '비교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물론 자연스럽게 되는 부분은 아니다. 부러움과 질투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때면,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매번 마음을 비우려 애썼다. 아이들로 인한 감사거리를 찾으며 더 좋은 감정들로 마음을 채우려 했다.
지금도 딱 그러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이제 취업을 앞둔 딸을 보면서도 감사를 찾고, 군 복무와 학업을 이어가는 두 아들 통해서도 감사거리를 찾는다. 취업, 결혼, 출산 등 앞으로 자녀들과 부모인 우리에게 닥칠 상황이 아직도 가득이다. 비교보다는 감사를 채우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훨씬 행복하리라고 결론을 내려 본다.
비교는 내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한다. 비교 금물! 부러우면 싸움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의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부러워하는 것은 안 할래.
작은 것도 인정해 주고 그저 사랑할 수 있는, 마음 넓은 부모 되기를 다시 연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