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던 날,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할머니는 병원에 오지 않으셨다. 몇 해 뒤 동생이 태어났고 할머니에게는 다행히도 남자아이였다. 할머니에게서만 차별을 받았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엄마에게도 크고 작은 차별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게 차별이 아니라는 건 내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두 딸아이의 엄마가 되고 난 뒤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계란프라이 사건이다. 정확한 전후사정이 기억나진 않지만, 식사시간에 동생에게만 계란프라이를 준 엄마에게 화가 나서 나도 계란프라이를 받을 때까지는 밥을 절대 먹지 않겠다고 심통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정말 많은 사건이 있었을 텐데 이리도 사소한 일만 기억이 나는 것도 참 신기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작 그깟 일로?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 당시 어린 나에게는 엄청난 상처였겠지.
그렇게 사소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아주 큰 차별을 받던 그 시절, 아빠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셨다.
식물인간.
아빠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몇 년을 버티셨다.
나는 너무 어려서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몰랐던 거 같다. 다만 병간호로 엄마가 집을 비워야 해 아빠는커녕 엄마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다는 것에 속상했다. 당분간 엄마 아빠가 아닌 이모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아빠는 여전히 기억을 잃었지만 몸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잠깐의 희망이 우리 가족에게 오려고 할 때 이번에는 동생이 아팠다.
뇌종양이었다.
그때 엄마는 어땠을까.
하늘이 원망스러웠을까?
마음이 찢어졌을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을까?
도망가고 싶었을까?
못난 딸은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속으로 이런 생각만 했던 거 같다.
나도 엄마가 필요해.
나도 엄마가 필요하다고!
초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나날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온전한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왔다.
중학생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대학생일 때 동생이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가 나를 봐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나는 이미 엄마가 필요 없을 만큼 다 자라 있었다.
나이가 자란 만큼 엄마를 이해하는 마음도 커졌다면 좋았겠지만 좁디좁은 내 마음속엔 나도 모르는 사이 온갖 감정의 응어리만 생겨났다.
그 이후 내 감정, 내 상황만 생각하던 나는 두 딸을 낳고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의 상황과 마음을 짐작해 보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그렇게 힘든 일을 당했을 때가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니. 나에게 그런 일이 닥쳤다면 과연 나는 엄마만큼 잘 이겨낼 수 있었을까? 끝까지 두 아이를 책임질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엄마의 입장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나밖에 몰라서 엄마와는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다. 하지만 내가 변해야 우리 가족이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모두를 위해 과거의 우리를 하나씩 끄집어 내 우리의 마음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한 번 더 감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