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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연 Aug 25. 2023

떼먹은 복채

예순셋 할머니의 콩고물 수다

고등학교 때 내 친구는 이대입구 사거리 대로변 큰 건물 맨 위층에 살았다. 지금은 시집가 버렸지만 아직도 친구의 아흔일곱 살 친정어머니가 그곳에 살고 계시니 여전히 그곳은 내 친구집이 맞다.


우리는 스물서너 살 때쯤 주로 그 친구집 주변을 몰켜 다니며 놀았는데 가미 분식에 가 주먹밥도 먹고 오리지널이라는 떡볶이 가게에서 튀김옷이 유난히 넓적하고 바삭하였던  튀김도 사 먹고 웨딩드레스가게 즐비하던 아현동 고갯마루 어느 건물 지하에 있던 항아리라는 카페에 죽치고 앉아 안경 쓴 남자 주인 눈총 받아가며 서너 시간씩 수다를 떨었다.


어느 날 친구가 이 골목쟁이 어딘가에 용한 점집이 있다더라 심심풀이로 우리 한번 가보자 하여 우르르 친구 넷이 가게 되었는데... 무당이 있는 그런 점집은 아니었고 김 봉수인지 김 봉석인지 아무튼 김봉 무슨 역술원이란 낡고 빛바랜 나무 간판이 붙어 있는 대문 열고 들어 가니 좁아터진 방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에 쉰 살쯤 돼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앉아 있었다.


누가 먼저 볼 거야? 저요.

친구가 생월생시를 말하니  대뜸  역마살이 있네. 집에 통 못 붙어 있겠어. 돌아다니는 직업이 좋겠다. 택시 기사 같은 거... 푸하하하 우리는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다.

그 말 맞다. 그 친구는 잠시도 가만히 집에 붙어 있질 못한다. 푸하하 그렇다고 꽃같이 예쁜 스무 살 처녀에게 택시 기사를 하라니...


그다음 누구?

지금은 미국으로 시집 가 영 연락이 끊어져 버린 친구 차례였다. 삼각관계에 휘말리길 잘할 사주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비슷한 말을 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친구는 사귀던 남자친구를 짝사랑하는 앳된  여자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속을 끓이던 터라 우리는 뭐지  이 사람? 서로 쳐다보며 신기한데? 눈으로 말을 하였다.


다음은 드디어 내 차례

슬슬 뭐 좀 맞춘다 싶으니... 나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이 삼켜졌다.

지금 어렵지? 근데 아가씨 나중에 옛말 하며 살겠다. 비행기도 많이 타고.. 비행기? 무슨 비행기? 내가? 그 아저씨 택도 아닌 소리를 하였다.

한테는 내 오늘 복채 받지 않으마 나중에 몇 배로 가지고 오너라. 무슨 영문인지 그날 역술가 아저씨는 끝내 나한테만 복채 받지 않았다.


운세 다 보고 나오다 우당탕퉁탕 그 사이비 역술가 아저씨 회전의자 빙빙 돌리다 중심을 잃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 것을 보며 당장 본인 의자에서 떨어질 일도 모르면서 무슨 남의 앞날을 점친다고... 친구들과 나는 골목 가파른 계단에 서서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나는 결혼하여 35년 항공사 근속한 남편을 만나 그날 한 역술가의 예언대로 비행기 하나는 원 없이 탈 수 있었다. 그 아저씨 말한 대로 떼돈을 벌지는 못하였으나 누구에게 손 벌려야 할 처지가 되지는 않아 예전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꺼내어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니 옛말 하며 살게 된다던

그 말도 말짱 헛말은 아닌 셈이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날 그 용한 역술가가 내게 하였던 뜬구름 잡는 것만 같이 허무 맹랑하게 들렸던  그 이야기들은 어쩌면 하늘에 계시던 나의 두 아버지께서 그분께 그리 말하라 시키신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아라.

한번 힘을 내 살아 보거라.

네가 남에게 해코지하는 일 없이 착하게 살면 내 먹고사는 걱정은 안 하고 살게 해 줄 것이다.

비행기도 많이 많이 태워주겠다.

꼭 그렇게 하여 주겠다.


그럭저럭 먹고살만해졌을 때  예전 안 주고 온 복채 생각이 나   그 골목을  다시 찾아가 보았으나 그곳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몇 배로 갚아 달라 하였었는데...

나중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나는 그날 역술가 아저씨 빌려 주었던 복채를 영 떼먹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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