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EP #1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 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2003년 2월 14일, 북한 장전항 해금강호텔 로비.

대한적십자사와 민화협 고위 인사들을 비롯해 주한 외교사절, 기업인 등 주요 인사들이 모인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 축하 파티 자리.


태산그룹 진명훈 회장은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붙잡고 두 눈을 살포시 감은 채 한 음, 한 음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금강산관광사업의 주최자이자, 육로 시범관광의 호스트 자격으로. 180cm가 넘는 껑충한 키에 약간은 마른 듯한 몸매였지만, 어깨가 무척이나 넓어 건장하다는 느낌을 주는 체격이었다. 백여명이 넘는 참석 인사들은 해상호텔 특유의 바닥이 기울어지는 움직임과 그로 인한 약간의 어지러운 증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남자의 노래에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비록 음정이 불안하고 박자도 정확하지 않은 노래였지만 '우리가 이런 자리가 아니면 언제 대한민국 최고 그룹 회장의 노래를 들어보겠나'라는 생각에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은 얼굴에 약간은 비염끼가 섞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일부 여성 인사들은 뜻밖의 가슴 뭉클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노래하는 그의 심경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고사 위기에 처한 그룹을 살려보려고 4년이 넘는 기간을 남북 경제협력사업에 총력을 기울였고, 정부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온몸을 다해 지원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왔건만, 막상 이제 와서 보니 그에게 돌아온 것은 형과의 그룹 경영권 분쟁 패배 결과로 남은 쭉정이 계열사 몇 개와 아버지 왕 회장의 죽음, 그리고 대북송금 특검 수사라는 칼날이 전부였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정부를 대신해 북한에 불법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탄로 나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목표였던 그룹의 회생은 고사하고 그룹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검 수사로 인한 개인적 고초보다는 그룹을 향해 엄습해 올 운명의 그림자가 두려웠다. 눈앞이 막막했고, 태산의 미래가 암담했고, 모든 것이 불안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떠나간 권력은 태산을 디딤돌로 노벨평화상을 얻었고, 탐욕을 챙긴 반면, 새로운 권력은 칼을 들이대고 있다. 정치권력의 칼춤 앞에서 경제권력은 무력했다. 특검 수사와 침몰하는 태산그룹의 운명 앞에서 그는 절박했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의 노래는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고만 있었다. 울컥 눈물이 솟았지만 흐르는 것을 막으려 고개를 젖혀 눈을 크게 떴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와 함께 폭발적인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중석 가운데 1열에 앉은 짧은 금발머리의 주한 루마니아 대사 부인이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앵콜을 외치자, 모두가 따라서 '앵콜! 앵콜!'을 소리쳤다. 거부하기 힘든 요청이었지만, 그는 양해를 구하려는 듯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곧바로 객실로 돌아와 응접 의자에 몸을 묻었다. 피곤했다. 그룹 고위임원 몇 명이 방으로 따라왔지만, 모두 돌려보냈다. 혼자 있고 싶었는데,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놈의 불안감이 지긋지긋하고 무서웠다.


북한 술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괜찮다는 개성고려인삼주로 온 더락 한잔을 만들어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북녘 2월 바닷가의 찬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그는 불빛도 없이 캄캄한 장전항을 좌우로 천천히 둘러보면서 손에 든 술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술은 자극적이면서도, 시원한 느낌이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외로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차가운 국민 정서, 무자비한 특검 수사,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그룹의 운명... 그는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 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 왔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싱가포르와 북경의 은밀한 만남들, 정상회담의 환희, 그룹의 추락... 그리고 치욕스러웠던 돈 거래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