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국정원장의 고민
2000년 2월 3일 오후 4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스며든 겨울 햇살이 무겁게 가라앉은 집무실 안. 국정원장 임현우는 대통령 주례보고를 마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서류를 덮던 김대진 대통령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임 원장, 얼마 전 북한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할 용의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소. 구정래 장관을 만나서 내용을 확인한 다음, 신빙성과 가능성을 분석해서 보고해 주시오.”
임 원장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대통령의 어조였지만, 그 말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뒤흔들 수도 있는 거대한 태풍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 임 원장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검토를 넘어, 6.25 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 쌓아온 대결의 벽을 허물거나, 아니면 국가 내부적으로 여론이 사분오열되어 극한의 대립 상황으로 빠질 수 있는, 한마디로 한반도 역사가 소용돌이 칠 수 있는 한복판으로 발을 들여놓으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국정원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임 원장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는 남북 대결보다는 대화가 국익에 더 이롭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에, 진보적 성향의 친북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실제로 국정원 내부에는 임 원장이 북한 감시용 장비 철거 등 국가안보의 예봉을 꺾는 조치를 지시한데 대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반감 여론이 상당했다.
‘북한 붕괴 전략의 첨병인 국정원 전사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북한 간첩을 잡는 것이 존재 이유인 요원들에게 ’적장과의 악수를 준비하라‘는 명령은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한 번 사는 인생을 오롯이 헌신하는 전사들이 이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가장 오른쪽 날개인 국정원이 비둘기로 변모하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정상회담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분노할 ’매파‘ 부하들을 다독여야 한다는 이중고 사이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설날 연휴가 끝난 2월 8일.
소공동 팰리스호텔의 안가, 임 원장과 구 장관이 마주 앉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조차 조심스러운 침묵이 흐른 뒤, 구 장관이 입을 열었다.
“북한이 태산그룹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답니다. 제3국에서 특사 접촉을 통해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후, 본격적으로 회담을 추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 원장은 구 장관이 뱉은 짧은 문장만으로도 대통령의 지시 내용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기에 더이상 논의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만남을 끝내고, 곧바로 국정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북한정보 분석부서에 북측 제안의 배경과 함의를 심도있게 극비 분석,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2월 24일, 국정원에서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는 치밀했다. 임 원장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보고서라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토씨 하나하나까지 꼼하게 검토했다.
‘북측 제의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닌 실질적 제안으로 보임. 조속한 특사 접촉을 통해 정확한 의사를 최종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됨.’이라고 냉철하게 진단한 후, ‘누구를 특사로 임명할 지에 대해 전략적으로 신중한 판단이 요구됨.’이라는 평가를 덧붙임으로써 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명분을 깔아주었다.
강남 제비가 물고온 박씨
정부의 검토가 신중하게 진행되는 사이, 태산그룹은 정부보다 한 발짝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돈과 생존이라는 원초적인 동력과 정보와 기회를 재빠르게 읽어내는 기업 특유의 속도감을 바탕으로 태산은 국가보다 더 예민하고 단호했다. 특히, ‘비선’ 요시다는 베이징의 식당가와 마카오의 카지노 VIP룸을 오가며 북한 아태 관계자들과 꾸준히 접촉했다.
그는 북한 수뇌부가 직면하고 있는 극심한 경제난, 외화난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정상회담만 성사된다면, 태산이 약속한 금강산관광 사업비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곧 이어서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지원이 쏟아질 겁니다. 조속히 남북 양측이 만나야 합니다.” 요시다의 집요한 설득과 로비에 두껍게 닫혀있던 북의 빗장이 마침내 열렸다.
2월 25일, 요시다는 낭보를 들고 진명훈 회장 앞에 섰다.
“3월 9일 싱가포르에서 특사 접촉을 하잡니다.”
진명훈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박씨를 물고 돌아왔구나.’
그는 즉시 구정래 장관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회담 자체는 물론이고 진행 과정도 엄정한 보안을 유지해주시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구 장관의 목소리는 신중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밤, 진 회장은 이진수를 따로 불러 지시를 내렸다. “이 부회장, 주변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당신은 홍콩을 경유해 싱가포르로 가시오. 나도 프랑스를 경유해 갈 거니까. 요시다에게도 극비 보안 유지하라고 하고. 만에 하나라도 정보가 새는 날에는 공든 탑이 다 무너지는거야. 명심하시오.”
그는 이진수를 대체할 인물에 대해 숱한 고민을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믿을만한 선택지가 없었다. 회담 준비는 초단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 속도와 무게를 감당할 인물은 결국 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2월 28일 저녁 8시, 청와대
김대진 대통령은 임현우 국정원장과 구정래 장관을 호출했다. 구 장관은 대통령의 눈빛에서 그가 이미 역사적 결단을 마쳤음을 간파했다.
“3월 9일 싱가포르 회담에 내 특사로 다녀오시오.”
구 장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통령님, 저는 대북 전문가가 아닙니다. 이쪽 생리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의중을 100% 반영할 수 있는 측근이 필요했다.
“저쪽에서도 김정일의 복심인 송호경이 온다는데, 우리도 내 측근이 가야 무게가 맞지 않겠소? 다녀오시오.”
김 대통령의 단호함 앞에 구 장관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는 결국 “알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김 대통령은 앞에 앉아있던 임 원장에게 지시했다.
“임 원장, 국정원 최고의 전문가들을 선발해서, 특사를 지원해 주시오.”
정치, 사업, 권력, 그리고 은폐와 음모의 톱니바귀들이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반도 평화를 매개로 역사적 위인을 꿈꾸는 대통령, 조직의 반발을 억눌러 가며 판을 짜는 국정원장, 정치적 영광과 추락 사이를 계산하는 특사, 그리고 그룹의 생존을 위해 도박을 거는 기업인.
싱가포르라는 중립지대의 습한 공기 속으로, 각자의 욕망을 품은 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한반도의 역사와 운명을 결정지을 전례없는 비밀 회담의 막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