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9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악취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무력한 사냥감



2000년 2월 29일.

4년에 한 번 ‘덤’으로 찾아오는 하루의 오전. 창밖의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으나, 진명훈 회장의 폐부 깊은 곳에는 납덩이같은 먹구름이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각, 정적을 깨고 핸드폰이 울렸다. 세상 고민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김영규의 유쾌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강 고문님께서 급하게 보자고 하십니다. 오늘 오후 3시, 다이너스티호텔입니다. 지난번 그 자리, 아시죠?”


순간 진 회장의 미간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다이너스티호텔. 같은 장소, 같은 방식, 범행의 현장을 바꾸지 않는 것은 권력자들의 ‘익숙한 위장술’이자, 자신들을 결코 잡히지 않을 포식자로 규정하는 오만함의 발로로 보였다. 하지만 그 무례함을 지적하거나 시비 걸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권력’의 생리였고, 그 권력 아래서 살아가야하는 기업인에겐 숙명과도 같은 굴레였다,


오후 2시 50분. 진명훈 회장은 이진수 부회장과 함께 호텔 커피숍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들어섰다. 김영규는 이미 도착해 있었고, 강갑철은 정확히 3시에 나타났다.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은 짙붉은 색의 청동상을 연상시켰다. 강갑철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향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진 회장, 지난번엔 정말 고마웠소. 덕분에 급한 불은 잘 껐소.”


진명훈은 강갑철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돈은 스위스계좌로 갔는데, 총선에 급한 불을 껐다고?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든 받기는 받았다는 얘기네.’


“별 말씀을요. 고문님 하시는 일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영광이지요.”


예의를 차려 차분하게 말했지만 그의 속내는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3천만불을 갖다 바쳤음에도 카지노 허가는 아무 진척이 없다. 그런데 나는 항의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진 회장은 스스로 입술을 깨물어 그 말을 삼켰다.

‘만약 내가 그때 거절했더라면, 나나 태산이 안전할 수 있었을까? 거절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태산이란 성벽은 서슬퍼런 권력 앞에 견고하지 않았고,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나쁜 놈들... 나는 필요할 때마다 살점을 베어 바쳐야 하는 봉이고, 인질이고, 사냥감에 불과하다.’


강갑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 회장, 총선이 코 앞인데... 상황이 심각하오. 막바지라 자금이 바닥이오. 한시가 급해요. 이번에도 좀 확실하게 도움을 부탁하오.”


순간, 진 회장은 멍하니 사고가 멎었다. 수백가지 계산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또인가. 이번엔 대체 얼마를 뜯어가려는 건가. 주면 카지노는? 면세점은 해결해 줄건가? 아니면 또 입을 싹 씻고 말건가.’


'곤란합니다.'라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올라 역류했으나, 뒤이어 닥쳐올 피의 보복이 그의 입을 짓뭉갰다.


국세청의 저인망식 세무조사, 금감원의 특별조사, 주거래은행의 자금 회수... 뻔뻔한 권력의 요구 앞에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낮게 깔린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영혼을 파는 계약서에 찍는 인장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채무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강갑철은 대답을 듣자마자, 볼일이 끝난 사냥꾼처럼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나머지는 김 회장과 얘기 나누시오.”


그의 퇴장은, 마치 ‘거래는 성사됐고, 당신은 돈만 내놓으면 돼’라는 선언 같았다. 이진수가 약속된 움직임처럼 배웅하기 위해 뒤따라 일어섰다.


남겨진 진명훈은 김영규를 빤히 응시하면서 최대한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엔... 얼마를 준비해야 하나?”


이성으로 통제된 그의 말과는 달리 김영규는 저녁 메뉴를 고르듯 가볍고 경쾌한 말투로 대답했다. “200억원 정도 생각하시더군요. 전액 현금으로. 총선 판에서는 아무래도 꼬리 안 잡히는 현찰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총선 판에서는 꼬리 안 잡히는 현찰이 제일이라고? 지난번 총선용이라던 3천만불은 왜 스위스로 보냈나? 그 돈은 총선용이 아니었다고 실토하고 있구만. 그 돈은 대체 누구 주머니로 들어간거야? 강갑철의 급한 불은 또 뭘로 껐나?’


진명훈은 속이 뒤틀리다 못해 경련이 일어났다.


200억. 부도 직전의 중견기업 수십 개와 수천 명의 가장을 살릴 수 있는 돈이 권력의 호주머니 속으로 증발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안 된다’는 말을 뱉지 못했다. 비겁함과 책임감이란 양면의 족쇄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진 회장은 죽은 사람마냥 의자에 파묻혔다. 그는 태산건설, 태산해운, 태산전자의 사장들을 차례로 호출했다.


자금 염출을 지시받은 김희규, 고석찬, 박진세 사장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은 체념이었고, 그들의 끄덕임은 공범의 정황 증거였다. 그들은 권력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기업가로서나, 직장인으로서 무엇보다 우선하는 처세법이라는 것을 오랜 세월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악취 가득한 고름



며칠 후, 어둠이 짙게 깔린 평창동의 한 고급 빌라 앞. 검은 승합차에서 여행용 대형 캐리어들이 줄지어 내려졌다. 그 육중한 가방 안에는 만 원권 지폐들이 숨 막히게 들어차 있었다. 누구의 사인도 없고, 어떤 회계 장부에도 기록이 남지 않은 돈. 그것은 기업인들의 피눈물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연극 무대 뒤에서 흘러내리는 악취 가득한 고름이었다.


그날 밤, 진 회장은 불 꺼진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책상 위의 탁상시계만이 무심하게 세월을 갉아먹고 있었다. 창밖의 화려한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그는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나는 결국 저들의 노리개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가 쓰고 있는 회장이라는 왕관은 머리를 찌르는 가시관이었고, 그가 앉은 왕좌는 창살없는 감옥이었다. 저멀리 수평선에서 태산을 집어삼킬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방패도, 아군도 없었다.


진명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완성해가는 이 비극적인 모자이크의 끝에는 오직 심연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단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암담한 어둠 속으로, 한발 한발 담담하게 잠겨 들어갈 뿐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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