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10화>

저격수의 총구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치명적인 오판



2000년 3월 2일, 태산그룹 본사 12층.


회장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서울의 도심은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 같았다. 젖은 솜처럼 무거운 납빛 구름이 빌딩 숲을 짓눌렀고, 공기는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습한 무게를 머금고 있었다.


진명훈 회장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창문 두 개를 차례로 밀어 열었다. 20센티미터가 채 될까 말까하는 좁은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날카로운 초봄의 칼바람이 그의 막힌 가슴을 조금이나마 뚫어 주었다.


책상 위는 ‘싱가포르用’이라는 선명한 선홍색 보안 도장이 찍힌 서류들과 태산그룹 해외투자 현황 자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명훈은 곧 김대진 대통령의 유럽 순방 사절단으로 출국해 싱가포르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는 지금 재벌 총수의 신분을 넘어 한민족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을 ‘밀사’가 되었다는 사실, 그 거대한 역사적 사명감에 감성이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도취감에 젖어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발밑에서 들려오는 그룹 내부의 균열 소리를 그저 ‘사소한 잡음’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태산제국의 기둥 밑동부터 흰개미 떼에게 갉아먹히고 있음을, 신기루 같은 명분에 가려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진수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진수는 언제나처럼 고급스럽고 깔끔한 회색 스트라이프 정장차림이었으나, 평소의 여유는 간데없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고, 눈빛은 유난히 날이 서 있었다.


“회장님, 정상회담 준비에다 대통령 순방 수행까지 여념이 없으신 줄은 압니다만, 긴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명훈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특유의 퉁명스런 말투로 대꾸했다.


“싱가포르 준비는 이미 끝난 것 아닌가? 지금 이 시점에 이 부회장이 직접 보고할 정도의 사안이 뭐가 있나?”


이진수의 목소리는 기름기 하나 없이 건조했고, 송곳처럼 직설적이었다.


“회장님, 지금 그룹 상황이 심각합니다. 건설은 유동성 위기로 하청업체들이 도산의 연쇄 고리에 묶였고, 전자는 은행권의 비협조로 라인 증설 자금이 막혀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운은 카지노와 면세점 허가가 지연되면서 손실을 감당하느라 ‘골수’까지 짜내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진 회장의 미간이 꿈틀했다. 튀어나오려는 짜증을 애써 참았다.


‘상황이 나쁜 걸 내가 모르나? 왜 이 타이밍에 그 말을 하지?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닌데...’


“그래서, 그 난국을 돌파하려고 내가 유럽으로, 싱가포르로 뛰어 다니는 것 아니오. 이 고비만 넘기면 대북사업의 물꼬가 터질 것이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를 텐데, 왜 이리 조급해?”


이진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정적 속에 수만 가지 계산이 오가는 듯 보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북사업은 성과가 나오기까지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 계열사들은 당장 눈앞의 생존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버텨내는 것 말고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나?”


이진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회장님께서 계열사 경영 위기를 극복하고, 그룹 전체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시려면 태산자동차를 회장님 직할로 편입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순간, 진 회장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그를 응시했다.


‘자동차를 가져오자고?’


그건 단순한 경영권 조정이 아니었다. 명기 형에 대한 선전포고이면서, 형제간의 전쟁이 발발함을 의미했다. 전문경영인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불온하고 대담한 제안이었다.


‘이 양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명훈은 결국 폭발하듯 언성을 높였다.


“이 부회장, 당신 제정신이야? 명기 형님이 쥐고있는 자동차를 무슨 수로 가져와? 지금 나더러 형님 등에 칼이라도 꽂으라는 거야?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사를 앞두고 집안 싸움이나 벌이라고?”


이진수는 미동도 없었다. 그는 그룹내에서 ‘저격수’로 불리는 사내였다. 그에게 한 번 찍히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다. 권력의 생리만을 믿는 냉혈한 인물. 지금 그 저격수의 총구가 주군인 자신을 향해 형제를 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명훈은 주변 지인들의 경고를 떠올렸다.


‘이진수는 위험한 인물이다. 너무 가까이 두지 마라.’


하지만 명훈은 자신했다. 병상의 아버지를 대신해 태산의 옥새를 쥔 것도 자신이고, 김대진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얻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명기 형의 경영 능력을 하찮게 생각했고, 그 측근들을 오합지졸로 여겼다. 정상회담만 성공하면 태산그룹 전체가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올 텐데, 굳이 지금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진수는 계속 밀어붙였다.


“회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진수의 목소리에는 은밀한 협박과 도발이 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플랜의 설계자라도 되는 듯한 태도.


명훈은 당장이라도 ‘당신, 지금 나를 테스트하고 있는 거야?’라고 정면으로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든 변수와 전선을 확대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진수는 아직까지 쓸모가 남아 있었다.


“거, 참... 산 넘어 산이네. 일단 지금은 급한 불부터 끕시다. 싱가포르가 코 앞이야. 내부 문제는 돌아와서 얘기합시다.”


이진수가 물러난 뒤, 진 회장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다듬었다.


‘이진수가 통제 범위를 한참 벗어나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가 필요해. 아버지는 누워 계시고, 그룹은 위기로 몰리고, 정부는 내 역할에 목을 매고 있지. 이 상황에서 대북 사업의 정교한 매듭을 지을 자는 이진수 뿐이야. 일단 정상회담을 성공시켜야 해. 그러면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때 가서 명기 형도, 이진수도 한꺼번에 싹 정리하면 돼.’


진 회장은 그것이 승자의 확신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고, 치명적인 오판이었으며,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방심이었다. 회색빛 서울의 하늘은 어느새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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